“동해 바다 건너서~” 교토국제고 새 역사 썼다
한국계 교토국제고, 고시엔 첫 우승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있는 고시엔(甲子園) 야구장. 전주가 시작되자 2800여 명에 달하는 응원단이 일제히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계 학교인 교토국제고 재학생·졸업생·학부모, 재일동포들이 한데 어울린 ‘떼창’이 끝나자,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고시엔 야구장을 가득 채웠다.
교토국제고가 새 역사를 썼다. 이날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도쿄 간토다이이치고를 2대1로 물리치며 사상 첫 우승기를 거머쥐었다. 재일동포들의 힘으로 전신인 교토조선중학교가 세워진 지 77년 만의 일이다. NHK는 ‘동해 바다 건너서~’로 시작하는 교토국제고 교가를 피날레로 일본 전역에 생방송 했다.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는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1회부터 9회 말까지 0대0. 10회 연장전, 노아웃 1·2루 상황서 시작하는 승부치기에서 교토국제고 에이스 좌완투수 니시무라가 대타로 나서 안타를 치며 무사만루 기회를 만들었다. 이어진 가네모토 유고 선수가 포볼, 세 번째 타자 미타니 세이야의 플라이(뜬공)로 연속 2점을 내자 관중석엔 함성이 퍼졌다.
이어 10회 말 간토다이이치고가 공격을 했지만 1점만을 내주면서 경기가 끝났다. 경기가 끝나자 응원에 참여한 재일동포들과 교토국제고 졸업생, ‘우정 응원’을 나온 교토지역 학생들과 서울 양천중 야구선수들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열악한 여건에서 이뤄낸 기적 같은 쾌거는 재일동포들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안겨줬다”고 축하했다.
교토국제고는 현재 중·고등학생 160여 명이 한국어·일본어·영어로 공부하고 있다. 재적학생의 30% 정도가 한국계 학생이다. 학생 모집을 위해 1999년 야구부를 창단했고, 전교생 138명 중 야구부 소속이 61명에 달한다.
야구 상위 1% 꿈의 무대, 전교생 138명 작은학교가 품었다
관중의 박수 속에 시상식 무대에 오른 후지모토 하루키(주장·3학년)는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이 꿈만 같다. 오늘 우승은 우리끼리 따낸 것이 아닌, 지금껏 우리를 응원해준 모든 분과 다 함께 이룬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부를 창단한 첫해 0대34로 교토국제고가 대패했던 시절부터 후원회장을 담당해온 김안일(72)씨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후원회장을 처음 맡았던 당시만 해도 한해 신입생이 2명에 불과할 정도로 학교는 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젠 우승할 정도가 됐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이번에 고시엔에 출전했으니 후원회장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승하면 그만두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100살이 되어도 그게 되겠냐’고 했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어온 교사들은 “학생들로부터 최고의 여름방학을 선물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백승환 교장은 “일본 야구 성지인 고시엔에서 승리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야구를 통해 한국과 일본에 아이들의 작은 힘으로 가교 역할을 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김태학 교감도 “교토국제고는 작은 학교로, 이번 야구부의 우승은 기적”이라며 “기쁘기도 하고 동시에 놀라기도 했다”고 말했다.
2021년 선수들이 첫 고시엔에 진출했던 당시 한국어 교가가 NHK를 타고 일본 전역에 방송되자 극우단체들의 협박이 이어지면서 교토국제고는 경찰이 학교 주위를 순찰할 정도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김 교감은 “한·일 정치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학생들이 야구대회에서 실력으로 우승한 것으로 봐줬으면 한다”며 “학생들을 한·일 우호를 위한 인재로 키울 수 있도록 교육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토국제고가 일본 야구 상위 1%만 출전할 수 있는 고시엔에서 우승하자 일본 언론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계 학교지만 학생 90%는 일본 국적. 고교생 수는 138명에 불과한데, 이 중 61명이 야구선수로 활약하는 ‘남다른’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선 교토국제고 선수들의 ‘랩 응원’이 화제가 됐다. 이날 야마시타 타코마(2학년) 선수는 “오늘 경기는 절대로 질 수 없어. 해온 게 다르니까. 질 것 같지도 않아. 알아듣겠지 내 말, 질 생각 없어. 1㎜도 없어”라는 랩을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교토국제고를 야구 강팀으로 만든 고마키 노리쓰구(41) 감독에 대한 조명도 이뤄졌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고교시절 교토지역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 대학 졸업 후 은행원이 된 고마키 감독이 교토국제고에 합류한 건 2006년. 당시 지인이 “주말 연습을 도와달라”고 해 아이들을 지도하기 시작하다 아예 은행을 그만뒀다. 당시 고마키 감독이 가르친 선수가 신성현(두산 2군 전력분석원). 일본어를 하나도 못하는 신성현을 위해 몸짓, 발짓으로 야구를 가르쳤다. 고마키 감독은 미니구장인 탓에 타격연습이 어렵자 일반 야구장을 빌려 훈련을 시켰다. 수비 훈련에 집중하고, 강한 타구를 만드는 것으로 특기를 바꿔나가면서 교토국제고는 달라졌다.
4강전을 앞둔 20일 학교 구장에서 만난 그는 교토국제고 야구부의 강점을 ‘헝그리 정신’으로 꼽기도 했다. 선수 기숙사에 에어컨도 안 나오고, 라커룸이나 샤워시설도 부족하지만 환경을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얘기다. 그는 “학교에 돈이 없기 때문에 (운동환경) 수준이 낮다. 그래서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오로지 반복 연습”이라고 강조한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이런 식으로 하고 있으니 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NHK에 따르면 고마키 감독은 이날 우승 직후 “치는 팀이 아니라 지키고 버티는 팀으로 공 하나를 대하는 의식, 질을 고집해 왔다”면서 “하루라도 더 함께 야구를 하고 싶다고 선수들에게 말해왔는데 설마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줄 몰랐다”는 소감을 남겼다.
실제로 끝없는 반복 연습은 교토국제고의 강점. 2021년 고시엔 4강에 처음 진출해 돌아온 당일에도 연습 훈련을 했다. 이날 만난 한 교사는 “오늘 우승했지만 돌아가서 선수들이 다시 연습할 수도 있다”며 “매일 수업이 끝나면 밤 9~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라고 웃으며 설명하기도 했다. 교토국제고의 승전을 구장에서 지켜본 박철희 주일 한국대사는 “교토국제고는 한국과 일본의 교육제도를 다 받아들인 협력의 상징”이라며 “이번 우승은 한국도 이기도 일본도 이긴 것”이라고 말했다. 진창수 주오사카총영사도 “일본 고시엔이라는 권위 있는 대회에서 학생들이 끝까지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줘 정말 자랑스럽다”고 축하를 보냈다.
니시노미야=김현예·정원석 특파원, 배영은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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