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 땅 대신 아버지가 받은 기막힌 유산

최여정 작가 2024. 8. 2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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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고모 무릎 베고 누워 그 과수원을 상상한다
일러스트=김영석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장마 끝 무렵이었던 것 같아. 그날도 일이 좀 늦게 끝났어.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펼쳤지. 과수원 쪽으로 발걸음을 떼려는데 누가 우산 속으로 쓰윽 들어오는 거야. 아이고, 어찌나 놀랐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을 돌아보니 웬 아가씨야. 흰 블라우스에 긴 머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예뻐. “언니예, 우산 좀 같이 쓸까예.” 이러드라. “어디까지 가는데예?” 그리 물었지. 그 아가씨가 그냥 건성으로 손을 들며 우리 과수원 쪽을 가리키더니 “저기예” 이러는 거야. 속으로 희한하네 싶었지. 거긴 우리 집밖에 없다 안카나. 마을로 가려면 저 짝으로 가야 되는데 말이야.

일단 우산을 쓰고 같이 걸어갔어. 우산 위에 후드득 비 떨어지는 소리만 울리고, 논두렁 밑의 개구리들이 잠도 안 자는지 꽥꽥거리고, 날은 후텁지근한데, 말 없이 그 아가씨랑 같이 걷고 있으려니 오슬오슬한 거야. 옆을 슬쩍 봤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그냥 걷더라고. 그러더니 이러는 거야. “언니예, 비신 신었네예.” 아이고마. 그때 그 목소리에 그냥 소름이 쫙 끼치는데, 이게 네댓 살 애기 목소리인지, 고양이 울음 소리인지 그냥 사람 목소리처럼 안 들리는 거야. 후들후들 떨면서 마을이랑 과수원이 갈라지는 길까지 왔어. 그래서 어디 가는 길이냐고 똑똑히 물을 참으로 옆을 봤더니, 세상에 그 아가씨가 온데간데없는 거야. 분명히 몇 초 전만 해도 비신 어쩌구 저쩌구 했는데 말이야. 그때 고마 다리에 맥이 탁 풀려가지고 우산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지. 저 과수원은 어찌 지나서 집에 가나 막막한데 세상에나, 저편에서 큰언니가 날 부르며 뛰어오는 게 아니겠어. 느희 큰고모 말이야. 마침 일이 있어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아이고, 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데이.

“그런데 고모! 비신이 장화야?” “하믄, 비신이 장화재.” 비 내리는 여름밤이면 지금도 떠오르는 고모의 ‘비신 이야기’. 제사상 물려 놓고 건넌방에 모여 앉은 고모들 틈새를 비집고 앉아 이름도 모르는 사돈에 팔촌 집안 사람들 사는 이야기에, 남편 흉에, 시댁 욕까지 더해 밤새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고모 무릎에 누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꾸벅꾸벅 졸다가 “고모 무서운 얘기 해줘요”라고 하면 작은고모는 그칠 줄 모르는 입담으로 밤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사과꽃은 매년 벚꽃이 질 무렵 피어난다. 사과 농가에선 4월 중·하순부터 5월 초까지 사과꽃을 따는 작업을 한다. 가장 크고 튼튼하게 자란 것 위주로 남겨 한 나무에 열리는 사과의 숫자를 조절하고, 당도 등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커다란 과수원 땅들이며, 금붙이며, 비단들이며 다시 찾을 길이 없어 그때를 추억하는 일이 부질없기만 하지만,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 푸념들이 이상하게도 나는 듣기 싫지 않았다. 고모 무릎 베고 누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할머니의 과수원을 상상해보는 일이 즐거웠다. 할머니는 겨울밤이면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 시원한 고구마를 깎아 연신 입에 밀어 넣어 주시며 봄이면 사과꽃 하얗게 피어나던 그 과수원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다. 어떻게든 이 악물고 남겨 두었다가 네 아버지에게 물려주었으면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못 버티고 팔아버린 내 탓이라는 할머니의 넋두리에 밤이 깊어갔다.

아버지는 지금도 사과를 기가 막히게 잘 고르신다. 내가 고르는 건 영 흐리멍텅, 푸석푸석 물맛만 나는데,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사 들고 오신 사과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단단하게 영근 사과 향기가 향기롭게 번지더니 달고 시원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하다. 과수원 땅 한 뙈기 물려받는 대신 사과 잘 고르는 법을 유산으로 받았다는 아버지의 농담에 웃음이 피식 난다. 과수원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할머니의 미련과 할아버지 떠난 집에서 장남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아쉬움 속에서 그 과수원 한번 보지 못한 내게도, 봄이면 사과꽃이 흰 물결처럼 일렁였다는 그 과수원이 늘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 긴긴 얘기를 우물 같은 가슴속에 평생 품어둔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할머니의 웅숭깊은 우물을 들여다본다. 옥색 한복 곱게 차려입고 흰 사과꽃 만발한 사과나무 밑에서 활짝 웃고 있는 할머니 얼굴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어린 자식들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 마을 사람들은 연약한 할머니가 오래 못 가 세상 뜰 거라며 수군거렸다지만, 할머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맞섰다. 때로는 씁쓸함으로, 때로는 아련함으로 떠올렸을 그 장면들을 나는 짐작도 못한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과거를 지나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발을 내디딜 뿐. 용기 있고 아름답게 생을 살아냈던 내 할머니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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