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덜덜 떨며 두통에 감기… ‘24시간 냉방 사회’의 괴로움
냉방병도 역대급
열기와 냉기 사이
서울에 사는 은행 임원 김모(49)씨는 최근 한두 달 새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건강 이상을 겪고 있다.
늘 머리가 띵하고 목이 칼칼하고 마른기침이 난다. 에어컨 켠 방에서 8시간 자는데도 밤잠을 잔 것 같지 않아 종일 피곤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관절이 저리고 피부 발진이 생기며 눈도 뻑뻑하다. 더위로 입맛이 떨어지고 술도 안 마시는데 몸이 붓고 이유 없이 체중이 늘었다. 소화가 안 되고 복통·설사가 잦다 싶더니 며칠 전엔 메스꺼움 탓에 구토할 뻔했다. 갱년기 우울증인지 기분도 가라앉아 있다.
검진 결과 별문제는 없었다. 대신 ‘냉방병 증후군’일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습식 사우나 같은 실외를 피해 직장과 집, 식당과 상점, 헬스장, 출퇴근 자가용과 지하철까지 에어컨을 풀가동한 공간만 오간 결과라는 것이다.
뾰족한 수도 없다. 김씨는 “요즘 날씨엔 밖에서 5분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냉방·제습이 안 되는 엘리베이터만 타도 숨이 막힐 것 같다”고 말했다.
나가면 열사병, 실내는 냉방병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이런 김씨의 촘촘한 냉방 생활은 기록적인 이번 폭염에 기후 관측 사상 최장 기록을 깬 열대야를 거쳐, 내달까지 5개월여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두어 달 바짝 더웠던 여름, 에어컨이 1년 중 10개월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예전 그런 날씨가 아니다.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 폭염이 매년 심해지면서, 올여름이 우리가 앞으로 경험할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폭염의 직접 피해자는 열사병과 일사병 환자다. 국내 온열 질환 환자는 3000명, 사망자는 28명을 돌파했다. 선풍기 한 대나 아이스팩 몇 개로 더위에 맞서야 하는 쪽방촌 등 취약 계층, 야외 작업이 필수인 집단에서 피해가 주로 발생한다. 각국에선 냉방을 누릴 수 있는 계층과 아닌 계층 간 격차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일종의 ‘부자병’인 냉방병의 고통을 논하는 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에겐 당장은 폭염 자체보다 만성화된 냉방병이 피부로 느껴지는 기후변화의 충격일 수 있다.
이유는 세계 최고 수준인 에어컨 보급률 때문이다. 세계 가정 에어컨 보급률은 2018년 기준 일본 91%, 미국 90%였고 한국이 86%로 3위를 차지했다. 5년 만인 지난해 한국 보급률은 98%를 돌파했다. 에어컨 대수는 6000만대를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밥솥·세탁기 안 두는 1인 가구도 에어컨만큼은 필수 가전. 에어컨 없는 노인들도 무료 지하철과 쉼터, 경로당, 은행, 인천공항 등 한기가 도는 실내를 찾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다.
냉방 사회 장막 속, 옛날엔 개도 안 걸렸다는 오뉴월 감기가 일상이 됐다. 요즘 이비인후과·내과·소아과의 환자 과반이 냉방병 환자라고 한다. 응급실엔 폭염 속 야외 작업 중 쓰러져 실려 오는 이들도 있지만, 독감 증세와 몸살과 고열, 탈진으로 밀려드는 이가 훨씬 많다.
골병드는 에어컨 대국
냉방병은 특정 질환이 아니라 차갑고 밀폐된 실내에서 오래 지낼 때 나타나는 여러 증상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인체가 적응할 수 있는 온도 차는 섭씨 5도 정도. 그런데 실내·외 온도가 10도쯤 벌어지면, 즉 요즘 날씨에 25도 정도인 실내에서 종일 지내다 보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뇌 혈류량이 감소하고 장 운동이 줄어들며 근육이 수축하고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온다. 미열에 두통·콧물·재채기 등 감기 증상에 피로·무기력증, 소화불량, 관절·근육통, 정서 장애가 나타난다. 면역력 약한 노약자와 만성병 기저 질환자는 그 영향이 더 심각할 수 있다. 여성은 수족 냉증과 생리통, 생리 불순이 심해진다. 심부 체온이 떨어지면 신진대사와 기초대사가 저하돼 같은 양을 먹어도 체중이 늘 수 있다.
감염성 냉방병으론 레지오넬라증이 꼽힌다. 에어컨 냉각수에 서식하던 레지오넬라균이 바람과 함께 호흡기로 전염된다. 독감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폐렴, 의식 장애, 신부전 등 장기 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즘 무섭게 확산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냉방 사회와 관련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폭염 탓에 실외 활동을 꺼리고 환기가 부족한 실내에 여러 사람이 뒤섞이다 보니 코로나가 속수무책으로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내성이 생겨 더위를 더욱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에어컨으로 채워진 도시의 폭염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에어컨은 열기를 없애는 게 아니라 열기의 위치를 안에서 바깥으로 바꿔주는 기술”(제프 구델 ‘폭염 살인’)이기 때문이다.
영국 국제개발환경연구소(IIED)가 지난 30년간 세계 20대 도시의 폭염 일수 증가세를 추적했더니, 서울이 증가율 7360%로 압도적 1위였다. 2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2배가 넘고, 세계 평균(52%)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서울 폭염 일수도 중동·남미·동남아 적도 부근 도시에 이어 12위를 기록했다. 같은 위도의 미·유럽·아시아 도시보다 훨씬 덥고 습하다.
한 건축가는 “요즘 도심 신축·재개발 아파트는 용적률 규제를 없애 건물 간 간격이 극도로 좁게 들어서고 있다”며 “실내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에만 의존, 자연 통풍과 환기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콘크리트·강철·아스팔트로 채워진 도시는 ‘에어컨 군비 경쟁’으로 도시 열섬화를 촉진하고, 낮 동안 쌓인 열기를 모아뒀다가 열대야로 이어진다.
냉방병을 예방하려면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고, 실내·외 온도 차를 줄이고, 환기를 자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후통과 무기력증으로 수액까지 맞았다는 대학원생 심모(24)씨는 “예방법을 몰라 냉방병 걸린 게 아니다”라고 했다. 학교·병원·식당 등 세균 번식 우려로 저온을 유지해야 하는 다중 밀집 시설이 많다. 폭염에 급증한 모기·날파리 때문에 창문 열기 두렵다는 이도 많다.
실내온도 1도 두고도 갈등
사람마다 적정하게 느끼는 온도는 천차만별이다. 고온 다습한 날씨가 불쾌지수를 높이지만, 폭염을 피해 모여든 실내에서도 시원함의 정도를 두고 부딪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대표적 갈등은 남녀 간 신체 온도 차. 대체로 여성은 남성보다 근육량이 적어 기초대사율이 낮고 온도 감각기관이 예민해, 같은 온도에서도 더 추워한다. 학교·학원에선 남녀 학생 간 “왜 이리 덥냐””너무 춥다”는 불만이 엇갈린다. 여학생들은 기모 후드에 담요까지 두른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선 아이들이 감기 걸릴까 봐 에어컨으론 습기를 빼면서 바닥엔 보일러를 때 냉기를 상쇄하기도 한다.
간호사 박모(34)씨는 “남성 의사들과 들락대는 환자들에게 맞춰 병원 내부를 20도에 맞춰 놓는다”며 “긴소매 옷으로도 모자라 여성들은 의자에 온열 매트를 깔고 경량 패딩에 스카프로 중무장한다”고 했다. 회사에선 25도로 맞춰진 사무실 에어컨 설정 온도를 여직원들이 26도로 올리면 남직원들이 23도로 내리고, 전원 껐다 켰다 신경전도 벌어진다.
젊은 남성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헬스장에 들어선 아줌마가 화난 얼굴로 에어컨을 꺼버려 어이없었다” “여름엔 더위 느끼는 사람한테 맞춰야 한다. 추운 사람이 옷을 더 입어라” 하는 성토가 이어진다. 병원 입원실에서도 환자마다 느끼는 냉기가 다르다 보니, 한쪽에선 “한기에 병 도진다”며 28도 이상을 요구하고, 다른 쪽에선 “땀띠와 욕창이 생겼다”고 하소연한다.
냉기와 열기 사이 오도 가도 못하는 사이, 기후변화는 이렇게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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