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가을이 오는가
베란다에 내놓았던 벵갈고무나무 잎사귀가 햇볕에 타들었길래 실내로 들여놓았습니다. 더위에 강한 열대 식물에도 이번 여름은 가혹했던 모양입니다. 지난 목요일은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였죠. 올해엔 ‘처서의 마법’도 발휘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바람의 기색과 햇볕의 기세, 하늘의 빛깔이 달라진 걸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퇴근길에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어요.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문태준 시인의 ‘처서’ 중 한 구절입니다. 시인은 더위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이 아니라 여위고 사위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합니다. 가을은 더위뿐 아니라 생명력을 발휘하던 여름의 모든 것들이 시들기 시작하는 계절이니까요.
박준의 시 ‘처서’도 어딘가 쓸쓸합니다. “앞집에 살던 염장이는/평소 도장을 파면서 생계를 이어가다/사람이 죽어야 집 밖으로 나왔다//죽은 사람이 입던 옷들을 가져와/ 지붕에 빨아 너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라고 시작한 시는, 이런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에는/속옷이며 광목 셔츠 같은 것들이/우리가 살던 집 마당으로 날아 들어왔다//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과 나는/ 희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들의 색을/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시인들이 아쉬움을 담아 처서를 읊을 수 있었던 건 그 여름이 미련을 가질 만큼 괜찮은 계절이었기 때문이겠죠. 앞으로의 여름은 올해보다 더 더워진다니, 여름의 끝을 안타까워하는 일도 지나간 시대의 낭만으로 기억될지도요.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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