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죽음 [윤평중의 지천하 10]
얼마 전 새벽 뒷산 전망대에서 겪은 일이다. 가벼운 운동을 하던 어르신 한 분이 돌연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쓰러진 분은 의식도 없고 호흡도 없는 듯 보였다. 심정지였다. 이때 전망대 옆 체력 단련장에서 운동하던 건장한 중년 남성이 총알처럼 뛰어왔다. 그가 심폐 소생술을 하는 가운데 주위 사람들이 어르신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119를 부르는 긴박한 순간이 흘러갔다.
어르신은 조금씩 심장 박동이 돌아오면서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응급조치를 주도한 의무병 출신 남성이 그 순간 전망대에 있었던 게 천행이었다. 쓰러진 분은 80대 초반이고 심장병 이력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이 어르신은 삶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것이다. 며칠 전 별세한 장인 어른은 그러지 못했다. 90대 고령의 장인은 구급차 안에서 심정지가 왔고 중환자실에서 열흘 넘게 투병하셨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응급 중환자실 풍경이 눈에 시리도록 차가웠다.
큰 병이나 인생 풍파를 겪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한 TV 프로그램엔 중병이나 사고 후에 ‘자연인’으로 물러나 사는 사람이 가끔 등장한다. 큰 병이나 사고를 만나 전격적으로 인생관이 바뀌는 회심의 체험을 한 사례다. 어지러운 세상사에 조금은 초연하게 된 분들이다. 만약 자신이 지금 시한부 생명이라면 돈이나 권력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린 재난이나 큰 병, 임박한 죽음 앞에서 벼락처럼 세상을 달관하는 귀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삶의 태풍이 지나가고 건강을 회복하면 우리는 돈과 욕망, 출세와 인정 욕구에 매인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적나라한 인생의 실상이다.
오랜 질병이나 고난이 인간을 세상사에 초탈하게 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각한 고통을 동반하는 만성 질환이나 장애는 환자를 자신만 생각하는 유아적 존재로 퇴행시킨다. 만성적인 몸의 통증에 따르는 절망감과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장기간 투병 생활은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간병하는 가족들까지 지치게 만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은 인생사의 통렬한 진실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통절한 아픔에 둔감할 때가 많다. 특히 타인의 육체적 통증은 우리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자신만의 육신에 갇혀 있는 인간 존재의 태생적 한계일 터이다. 장기간 크게 앓고 있는 환자에겐 의사의 사무적인 태도나 투병 소식을 접한 가족, 친구, 지인들의 심상한 반응이 깊은 상처가 된다. 치명적 질병이나 중대 사고에 따라오는 시한부 선고는 더욱 아득한 일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과 절망의 심연을 가늠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타심과 공감 회로가 경이로운 힘을 발휘해 모든 한계를 돌파할 때가 있다.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들이 서로 온 힘을 합쳐 ‘뒷산 전망대 어르신’을 살린 게 대표적이다. 각종 재난과 사건 사고에서도 우리는 ‘의인’들의 놀라운 활약을 본다. 자기만을 앞세우는 인간의 본성적 한계를 넘어선 동료 시민들의 헌신과 인간애가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며칠 전 장인 어른을 모신 산 위 공원 묘지는 찌는 듯 무더웠지만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정갈하고 충만한 일생을 살아온 고인이 건강할 때 마련하고 기뻐한 공원 묘원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산 아래 저 멀리 금강이 소리 없이 흘렀다. 남겨진 이들이 아무리 애통해해도 ‘죽음은 언제나 각자의 죽음’이다. 하지만 죽음과 병을 인생의 필연적 조각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네 삶은 깊고 풍요로워진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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