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도 품다, K발레 지평 넓힌 춤판

유주현 2024. 8. 24.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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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한여름밤의 꿈' [사진 세종문화회관]
동시대 예술이란 상식을 파괴하고 대안을 찾는 행위다. 현대음악이 선율과 화음을 초월하다 못해 ASMR 류의 소음까지 수용하고, 현대미술이 작가마다 별난 소재와 매체 찾기에 혈안인 이유다. 현대무용도 그렇다. 기존 문법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표현에서 예술성을 찾곤 한다.
‘컨템포러리 발레’를 표방한 서울시발레단이 창단공연 ‘한여름 밤의 꿈’(23~2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사진)을 개막했다. 클래식 중심의 한국발레에 새 장을 연다는 포부다. 현대무용을 전공했지만 발레 기본기가 탄탄한 재미안무가 주재만이 안무와 총연출을 맡았다. 컨템포러리 발레와 현대무용은 뭐가 다를까. 클래식발레의 꼿꼿한 축과 정형화된 패턴을 무너뜨리며 움직임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도 발레 본연의 미적 쾌감을 버리지 않는 게 컨템포러리 발레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밤의 꿈' [사진 세종문화회관]

주재만의 스타일도 현대무용스러운 역동적인 움직임이 단위가 되지만 질서와 균형이 굳건한 큰 그림을 그린다. 컨템포러리 발레단이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창단공연으로 택한 건 반전이다. 고전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가 시작했고, 추상발레의 선구자 조지 발란신도 이 텍스트만큼은 고전발레처럼 안무해 지금껏 뉴욕시티발레단, 파리오페라발레단 등의 인기 레퍼토리임을 상기할 때, 주재만의 시도는 도발에 가깝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사진 세종문화회관]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한여름밤에 꾼 꿈을 발레로 펼쳐보였을 뿐, 원전의 스토리와는 무관하다. 꿈이란 알 수 없는 기호의 연속이듯, 사랑을 꿈꾸며 무의식중에 그리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서사적 흐름을 완전히 벗어난다. 유일한 캐릭터 ‘퍽’은 이 꿈의 흐름을 주관하며 사랑의 우여곡절을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중심을 잡는다. 스토리가 없어도 설득력은 있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면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처럼 별빛 속에서 춤을 추는 꿈을 꾸지 않나.

주재만은 스토리 대신 컨템포러리 발레의 매력을 보여주는 데 총력을 쏟았다. 국내 최대 규모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를 발레 공연에서 전에 없던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채웠다. 음악부터 달랐다. 프티파부터 발란신, 프레데릭 애쉬튼까지 축혼행진곡으로 유명한 멘델스존의 관현악곡 ‘한여름밤의 꿈’에 기댔지만, 주재만은 사랑에 열정도 고통도 많았던 슈만의 가곡과 피아노곡을 발굴해 노래가 흐르는 시적인 무대로 만들었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사진 세종문화회관]
거대한 깃털 구름과 로맨틱 튀튀, 토슈즈로 클래식 발레를 오마주하기도 했지만, 고정된 테크닉을 온몸으로 밀어내는 고난도 동작의 연속에 시종 눈을 뗄 수 없다. 동성애를 암시하거나 섹슈얼한 움직임도 편견을 거부한다. 컨템포러리로선 보기 드문 2막 구성도 내용이 아닌 비주얼로 나뉜다. 1막은 검정 톤의 빈 무대에 쏘는 영상으로, 2막은 순백의 세트와 오브제로 압도적인 미장센을 구축한다. 타는 듯 새빨간 나무 오브제에 조명과 영상을 겹쳐 나무가 춤을 추는 마법을 구현하는 식이다.

압권은 피날레다. 폭 23m 광활한 무대 위에 구현된 동트는 새벽이 장관이다. 긴 밤을 지나 이제 꿈을 깰 시간. 여명이 밝아오는 푸르스름한 조명과 필립 다니엘의 피아노 라이브가 넘실대는 가운데, 물속을 유영하는 새벽공기처럼 자유로워 보이는 푸른 유니타드 차림의 군무가 한국 발레의 새 시대를 선포하고 있었다.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사진 세종문화회관]
해외에서도 2시간짜리 전막 컨템포러리 발레는 잘 없다. 보수적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런 도발적인 춤판이 벌어진 것도 최초다. 안호상 사장은 “한국 안무가들을 위해 벌린 판”임을 강조했다. 그간 발레계의 계륵이었던 ‘한국적 창작발레 개발’이란 화두를 넘어 ‘컨템포러리’라는 방향설정으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었달까. 세계 어느 곳의 발레 애호가라도 즐길만한 무대로 K발레의 지평을 훅 넓힌 건 분명해 보였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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