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더 많이 죽었다... '숫자'가 된 과거 [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2024. 8. 2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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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숫자’가 된 과거
과거가 미래보다 더 예측하기 어렵다는 옛 소련의 농담이 있다. 권력의 장단에 춤추는 역사학에 대한 신랄한 야유가 그 웃음 밑에는 깔려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건국절 논쟁에서 보듯이, 권력의 부침에 따라 거칠게 요동치는 과거는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익숙한 광경이다. 이 연재 ‘반전(反轉)의 세계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사의 상식이 그렇게 요동치는 과거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과거가 달라지면, 미래도 달라진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들. 수용소는 보관 중인 신발 10만 켤레 중 2만 켤레를 전시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인구비례로 볼 때,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1947년 폴란드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인 사망자 수는 602만8000명으로 전체 인구 2400만 명의 4분의 1에 달했다. 이 비율은 전체 인구의 12.4%를 잃은 소련의 2배에 가까웠다. 바르샤바시에서만 72만 명이 죽었는데, 이는 프랑스 전체 민간인 희생자 10만 명의 7배가 넘는 수치였다.

폴란드인들의 희생은 질적으로도 심각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지식인과 엘리트 그룹일수록 타격이 컸다. 항소법원 변호사의 56.9%, 의사의 38.7%, 대학교수의 28.5%, 중등학교 교사의 13.1%가 목숨을 잃었고, 가톨릭 사제도 주교 5명을 포함해서 27%가 죽었다. 폴란드 전체의 대학 졸업생 중 약 3분의 1이 희생된 셈이다.

재산 피해도 막대해서 1939년의 달러화 가치로 환산했을 때 폴란드의 피해액은 무려 492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프랑스·유고슬라비아·네덜란드·체코슬로바키아·그리스·벨기에·노르웨이가 입은 피해액을 모두 합친 449억 달러를 웃도는 높은 수치였다. 나치의 침공을 받은 국가 중에는 단지 소련의 물적 피해만이 폴란드를 능가했다.

폴란드인 사망 603만명→520만명으로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한 관람객이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EPA]
폴란드인의 희생자 수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세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600만에서 560만~580만으로 줄더니 다시 520만까지 줄었다. 최대 80만에 이르는 희생자 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이나 아픔이 크게 줄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억울한 희생자의 관점에서 볼 때, 1명이 됐든 600만 명이 됐든 애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기억 정치에서는 통계가 더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다민족국가였던 폴란드의 경우, 숫자가 된 과거는 더 복잡하다. 600만 희생자 설에서는 유대계 폴란드인과 인종적 폴란드인이 각각 300만의 희생자로 평등한 죽음이지만, 500만 명대로 떨어진 새로운 희생자 통계에 따르면 유대계 300만 명, 폴란드계 200만 명, 기타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등 소수민족 60만 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문제는 전체 희생자 수가 줄었다는 것보다, 유대인 희생자 수가 종족적 폴란드인 희생자보다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이 수치는 폴란드 민족이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굳게 믿어 온 인종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근거를 흔들어버렸기 때문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희생자는 통계로 잡힐 때만 중요한 민족적 자산이 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스탈린의 농업 집산화로 인한 대기근 ‘골로드미르’의 우크라이나 희생자 수를 630만으로 늘려잡기 시작했다. 아직도 증가하고 있는 이 수치는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 600만보다 많은 숫자이다. 스탈린주의 소련에 의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희생이 나치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보다 더 컸다며 세계 여론에 어필하는 양상이다.

희생자 수가 많을수록 역사적 정당성이 더 큰 것 같은 착각이 그 밑에는 깔려 있다. 민족적 위대함 대신 역사적 희생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시대정신이 그런 착각을 부추겼다. 러시아의 침공 또한 이런 경향을 더 강화했을 것이다. 근거가 의심스러운 희생자 통계에 매몰되면서, 나치 협력자이자 홀로코스트의 공범자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과거는 슬며시 지워졌다. 과거는 이렇게 숫자로 환원되었다.

한국의 과거는 어떤가?
일본 나가사키시 평화공원에 건립된 ‘한국인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 [연합뉴스]
영화나 드라마, 인터넷 등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한국인 희생자 수는 보통 ‘수백만’이라고 이야기된다. 인터넷에 떠도는 설 중에는 조선인 희생자가 일본인 희생자 300만 명보다 더 많은 317만2000명이라며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국전쟁도 일본 책임이니 한국전쟁 사망자까지 합치면 630만 조선인 희생자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이니, 630만이 죽은 한민족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가장 큰 희생자라는 결론도 가능하다. 스탈린의 ‘골로드미르’에 희생된 우크라이나인들만이 한국인 희생자에 버금갈 뿐이다.

그런데 이 수치는 지나친 과장이다. 해방 공간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서울에서 여러 번 개최된 아시아·태평양전쟁 사망 동포 위령제 주최 측은 ‘7만 영령’이라고 희생자 수를 못 박고 있다. 1947년 유엔의 경제사회위원회의 극동 지역 리포트도 7만이라는 숫자를 적시하고 있다. 아마도 일본 원호처의 통계를 원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금 다른 통계도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의 전문가이자 비판적 역사가 요시타 유타카는 식민지 조선의 희생자 수를 20만까지 올려잡고 있다. 이는 징병과 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를 모두 포함한 숫자이다. 이 수치를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식민지 조선의 전체 인구 1574만 명으로 나누면 약 0.44~1.2%의 비율이 나온다. 어떻게 해도 조선인 희생자가 ‘수백만’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7만에서 20만에 이르는 조선인 희생자는 1500만이 죽은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군 점령기 자바에서만 기아와 질병 등으로 300만이 죽은 인도네시아나, 전쟁 막바지 대기근으로 100만이 아사한 베트남과도 규모가 다르다. 식민지 조선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는 속설을 뒤집는 이런 통계를 불편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나마도 해방 직후 이들은 조국에서도 ‘버림받은 전사자’였고 ‘망각된 죽음’이었다. 징병·징용 생환자들로 구성된 ‘태평양동지회’나 일본제국 해군 출신의 ‘조선민족해양청년단’이 해방 공간에서 추진한 위령제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억울하게 왜놈을 위해 아까운 생명을 바친 동포’인 조선인 전쟁희생자들은 측은지심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들의 죽음이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도래를 기다려야 했다.

난징대학살이라는 과거도 예측불허였다. 중국의 정설인 30만 희생자 수치는 공교롭게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 수를 약간 넘는다. 그래서 일본의 원폭 희생자보다 더 큰 30만이라는 난징대학살 희생자 수치는 중국의 역사 인식에서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미제’와의 투쟁에 집중하기 위해서 ‘일제’가 자행한 난징대학살은 옆으로 밀어놓았던 1970년대 중국공산당의 공식 기억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난징대학살 30만명, 원폭 피해자 웃돌아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 역시 도외시된 것은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우라카미 대성당 위에 형성된 폭심은 ‘서양 신’을 믿는 이들에 대한 천벌이라는 이웃의 수군거림을 낳았다. 나가사키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전통 사회에서 천대받은 ‘부락민’이었다는 사실과도 연관이 있다. 훗날 이들의 죽음을 기릴 때조차, 식민지 조선인이나 오키나와인, 대만인 등은 비국민으로 빠졌다.

숫자가 된 과거는 희생자에 대한 내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개인의 죽음은 다 안타깝고 슬프다. 희생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죽은 자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가족과 친구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가까운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웠기를 빌 뿐이다.

역사가의 임무는 어느 민족이 더 많이 죽고 더 큰 희생자였나 하는 경쟁에서 이기는 게 아니다. 더 적게 죽어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게 역사가의 자세는 더더욱 아니다.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럴 때, 우리의 과거는 지금의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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