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 지붕 오른 고무공장 여공

이후남 2024. 8.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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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연대기, 1931-2011
남화숙 지음
남관숙 옮김
후마니타스

‘체공녀’는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평양의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간 여성 강주룡에게 당시 언론이 붙여준 표현이다. 체공(滯空)은 공중에 머문다는 뜻. 고무공장 직공이었던 강주룡은 지붕 위에서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다”며 요구를 뚜렷이 밝히는 연설을 펼쳤다. 앞서 평원고무는 직공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이 벌어지자 모두 해고하고 신규 채용을 시작했다. 이에 강주룡을 비롯한 여공들은 단식과 농성으로 맞서다가 공장 밖으로 쫓겨난 참이었다.

을밀대 사건 직후 잡지 ‘조광’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전해지는 강주룡의 삶은 여러모로 놀랍고 흥미롭다. 그는 간도에서 만나 스무살에 결혼한 다섯 살 연하 남편의 첫인상을 “아주 귀여운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남편과 함께 독립단의 게릴라 활동에 참여한 이력도 밝혔다. 남편의 병사 이후 조선에 돌아와서 “내가 밥벌이를 하면서 아들노릇을 했다”고도 했다.

1931년 평양의 을밀대(乙密臺) 지붕에 올라간 고무공장 여직공 강주룡이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앉아 있는 모습. 당시 동아일보에 관련 기사와 함께 게재됐다. [사진 후마니타스]
이 책 『체공녀 연대기, 1931-2011』은 이런 강주룡의 삶만 아니라 당시 고무 산업의 현황, 평양의 산업과 상업을 주도한 이들의 특징, 신간회와 자매조직 근우회의 활동을 비롯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복잡다단한 흐름, 이른바 적색 노조의 조직 활동, 공장 파업과 민족 자본을 둘러싼 미묘한 입장 차이 등을 고루 상세히 전한다. 책에 따르면, 당시 평양의 고무공장은 주로 조선인이 소유한 중소기업으로 고무신을 생산했다. 평원고무에 앞서 1930년 여러 공장이 일제히 임금을 삭감하자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고, 강주룡과 동료들 역시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여공들의 파업과 단식은 온정적 시선으로 조명되곤 했지만, 한편에는 당시 보도에 인용된 기업인의 말처럼 “여공들은 남자가 있으니… 삯이 헐해도 상관없다”는 시각이 존재했다. 관련 보도 등에서 강주룡과 같은 파업 지도부 여공들이 ‘투사’가 아니라 ‘여장부’ ‘여사’ 등으로 지칭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파업 이후 협동조합 등 노동자 소유 고무공장을 만들고 운영하는 시도도 벌어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만든 공장으로 해방 이후 귀속재산이 된 조선방직, 줄여서 조방의 상황과도 연결된다. 1950년대 초 전시 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조방 파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은이는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등 1953년 노동법의 제정·공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원제가 ‘Women in the Sky’(하늘의 여성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역사학자로 현재 워싱턴대 교수인 지은이가 2021년 미국에서 펴낸 영문 저서의 우리말 번역본이다. 지은이는 여러 선행 연구와 각종 자료를 풍부하게 인용하며 여공, 즉 여성 산업 노동자의 활동과 시대별로 중요한 지점을 부각한다. 1930년대 고무공장 파업, 1950년대 조방 파업, 1960~70년대 민주노조 운동 등이 그런 지점이다.

충실한 각주가 빼곡히 붙은 학술서인데, 아무래도 생생히 와 닿는 것은 여공들의 구체적 삶과 말이다. 그 이름 석 자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지만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운동 발전의 촉매가 된 1962년 전남방직의 ‘김 양’,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글을 팔뚝에 남긴 1991년 부산 신발 기업의 미싱사이자 노조활동가 ‘권미경’을 비롯해서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은 2011년 장기간의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중공업 노조를 이끈 지도자이자, 앞서 20대에 조선소 용접공으로 취직해서 ‘아저씨’ 동료들 틈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의 삶과 말이 소개된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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