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만났던 바이든과 안희정
2008년 미 대선 흑백·남녀·노소 대결로 세계적 관심 고조
오바마 대신 인터뷰한 바이든 “북핵 해결법 10초내에 말 못해”
반미로 구속됐던 안희정, 미국과 인맥 쌓으려 비공개 모임 참석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23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멀라 해리스 대통령 후보 다음으로 주목받은 인물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오바마는 부인 미셸과 함께 연사로 나서서 2008년 대중을 휘어잡았던 간결한 선거 구호 ‘예스 위 캔(우리는 할 수 있다)’을 ‘예스 쉬 캔(해리스는 할 수 있다)’ 으로 바꿔 말하며 녹슬지 않은 정치 감각을 드러냈습니다.
이 장면은 그가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던 2008년 민주당 전당대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2008년 8월 25일부터 4일간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흑인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당시 워싱턴 특파원이던 저는 덴버 민주당 전당대회를 현장 취재, 총 14건의 기사를 작성해 한국으로 보냈는데 본사 편집국은 이중 절반 이상의 기사를 종합 1, 2, 3면에 배치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72세의 백인 공화당 대통령 존 매케인 후보와 47세의 흑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맞붙는 미국의 대선은 한국에서도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 대선은 흑백(黑白)과 노소(老少)의 대결로 극적인 흥행을 일으켰고, 44세의 여성 주지사(알래스카) 세라 페일린이 매케인의 부통령 후보로 합류, 남녀(男女) 대결까지 더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보다 더한 관심속에 “미 대선 기사는 쓰고, 쓰고, 또 쓰고!”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민주당의 상징인 푸른색 조명이 행사장을 비추는 가운데 막을 올린 전당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바마를 공화당의 매케인과 확실히 차별되는 ‘희망과 화합의 차기 대통령’으로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맞춰졌습니다. 이 전당대회의 절정은 역시 오바마가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28일 멀리 보이는 로키산맥으로부터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인 8시 15분쯤이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오바마가 전당대회장인 덴버시의 옥외 미식축구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8만여 명의 참석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오바마 후보가 24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그리스 신전 모양의 연단에서 15m 가량 앞으로 걸어나올 때 열광적인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오바마가 “깊은 감사와 겸손함으로 여러분의 대선후보 지명을 수락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수 천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지는 장관이 연출됐습니다.
◇ 오바마 연설에 흑인들 감격의 눈물
오바마는 여기서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 중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케냐와 캔자스주 출신의 나의 부모는 유복하거나 유명하진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아들이 가슴속에 품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말로 청중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날이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45년 전에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흑인들에겐 감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만났던, 샌디에이고에서 온 흑인 재키 마틴은 “오바마가 너무 자랑스럽다. 이번 전당대회에 참석했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흑인이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수락연설을 한 것은 미국의 232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1863년 노예해방이 이뤄지고 흑인 남성이 1869년 투표권을 확보한 지 139년 만입니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에 따라 흑인은 물론 미국 내 소수인종의 권익 신장 속도가 빨라졌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또 ‘오바마 현상’이 세계로 퍼지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에 대한 지지가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오바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는 침체하고 외교안보엔 구멍이 뚫렸다며 “미국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미래를 향해 행진하자”고 외쳤습니다. 또 미국 혼자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없으며 다른 국가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바마는 특히 이라크에서 4000명, 아프가니스탄에서 500명이 넘는 미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을 의식, 매케인과는 달리 미군의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신중한 파병(派兵)을 전면에 내걸어 지지를 받았습니다 . ”군(軍) 통수권자로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임으로써 외교안보 경험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희석하려고도 했지요. CNN방송은 오바마의 연설이 민주당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4일 간의 전당대회에서 절정을 이뤘다고 평가했습니다.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정체상태였던 지지율이 상승했습니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 후 갤럽 여론 조사에서 오바마는 48%, 매케인은 42%를 기록했습니다. 전당대회 시작직전에 매케인 후보와 박빙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전당대회 효과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오바마,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
오바마는 전당대회가 시작되기 이틀전인 8월 23일 지한파(知韓派)인 조지프 바이든(당시 65세) 상원 외교위원장을 자신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합동유세를 시작했습니다. 오바마보다 18세 위인 바이든은 36년간의 상원 의원 경험을 바탕으로, 오바마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 부족을 보완해줄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오바마는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에 바이든 부통령 후보와 함께 흰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타나 “바이든은 외교 안보의 전문가로 그의 가슴과 인생의 가치기준은 확고하게 중산층에 뿌리박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또, “바이든은 수십 년 동안 워싱턴에 변화를 가져왔지만, (부패한) 워싱턴은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바이든은 “나와 오바마는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지만 공통분모가 있다”며 자신이 노동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오바마처럼 자수성가한 인물임을 강조했습니다. 바이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한반도 상황에 대해 자주 의견을 교환해 주목받았습니다. 2001년 8월 청와대로 대통령이 된 DJ를 예방하기도 했는데, 당시 바이든은 김 대통령의 넥타이가 좋다고 찬사를 했고, 김 대통령의 넥타이 교환 제의에 즉석에서 바꿔 맸다고 합니다. 당시 DJ 넥타이에는 수프 국물이 묻어 있었지만, 바이든은 언젠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행운의 상징물로 여겨, 이후 한번도 세탁하지 않고 그 넥타이를 보관해 왔는데 결국 2020년에 그 꿈을 이뤘습니다.
◇ 전당대회 3일째 날 오바마 대신 만난 바이든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면서 당시 워싱턴 지국에 함께 근무하던 최우석 선배는 공화당을, 저는 민주당을 맡기로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최우석 특파원은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매케인 후보를 인터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바마를 만나는데 실패했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취재하면서 주요 취재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역시 오바마 후보였습니다. 오바마와 경선에서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만 해도 접점이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초선의 상원이었던 오바마의 선거 캠프는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흑인 후보 오바마에 대한 테러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는 상황에서 오바마가 외국 기자를 만나는데 소극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함께 덴버에 간 다른 한국 특파원들도 오바마를 접촉하지 못했습니다.
오바마 대신 바이든 부통령 후보를 인터뷰 하기로 하고 기회를 노렸습니다. 전당대회 3일째날 바이든을 만날 기회가 왔습니다. 바이든이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 후, 민주당의 핵심 지지자 100여 명을 만나 간담회를 한다는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2007년 워싱턴 부임 후 잘 알고 지내던 민주당 취재원으로부터 이 모임에 참가할 ‘티켓’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간담회에 가 보니 바이든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와 사진을 찍으러 몰려든 참석자들 속에서 북핵 문제에 대해 한 차례 질문만 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든은 30년 경력의 노련한 상원의원답게 “북핵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지만, 10초 내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기회에 북핵 문제에 대해 논의하자”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날의 짧은 만남은 사진 한 장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정치부 기자로 줄곧 활동해 온 제게 덴버의 민주당 전당대회는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전당대회나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 당원 동원에 대해 걱정하는 반면, 민주당 전당대회 참석자들은 4일 동안 직장에 휴가를 내고 자비를 들여 축제처럼 참석했습니다. 한국의 정당도 언젠가 미국과 같은 전당대회를 치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비공개 모임에서 재회한 안희정
당시 덴버에서는 전당대회에 맞춰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수장으로 있던 ‘국제 지도자 포럼(ILF)’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비공개로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안보 브레인들이 모두 참가하는 회의였습니다. 나중에 유엔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하는 수전 라이스와 오바마 대통령의 법률고문에 임명되는 그레그 크레이그가 외교·안보 청사진을 설명했습니다. 수전 라이스는 올해 시카고 전당대회에서도 사실상 해리스 캠프를 대신해 기자회견을 갖고 “카멀라 해리스 정부가 출범하면 조 바이든 대통령처럼 동맹을 중시하고 국제현안에 적극 관여하는 외교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만약 해리스 정부가 출범할 경우, 라이스가 요직을 맡거나 막후에서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할 가능성을 시사한 장면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브레인이 총출동한 이 모임에는 이태식 주미대사와 최형두 문화일보 특파원(현 국민의힘 의원)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희정 현 충남지사를 만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한국 민주당의 최고위원 겸 ‘국제 지도자 포럼(ILF)’의 회원 자격으로 전당대회 관련 행사를 참관하고 있었습니다.
회의 후, 안 지사가 민주당 측 인사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인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골수 반미(反美) 운동권으로, ‘반미 청년회’라는 모임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던 그가 미국 전당대회장을 방문한 것은 쉽지 않은 결정으로 보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미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이러한 인식에는 ‘좌희정 우광재’로 불릴 정도로 최측근이었던 안 전 지사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많은 돈을 들여 덴버를 방문한 것에 놀라면서도 반가웠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안희정씨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바깥 세상을 알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느꼈습니다.
안 전 지사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남긴 미 민주당 전당대회 참관기는 저의 관찰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전 세계 진보주의, 자유주의 정당들이 세계화가 드리우고 있는 양극화와 극심한 경제 전쟁 상태를 연대하여 극복할 수 있는 대안과 비전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포부와 구상에 작은 힌트라도 얻으려 노력하겠습니다.” 덴버 방문 중 그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과 민주당 중진 의원들을 만나 한반도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바마가 당선된 후 인터뷰에서 민주당 전당대회 참관 경험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흑인(버락 오바마)과 여성(힐러리 클린턴)이라는 미국 사회의 비주류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여부는 ‘약속과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 정신이 실현될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중대한 갈림길”이라며 “한국도 모든 주권자에게 기회가 열린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과제를 안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글로벌 표준이 되기 위해 미국과 경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오바마의 승리는 미국 진보주의 및 민주주의 승리이자 세계 민주주의 승리입니다”라고 미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평가하며, 버락 오바마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했습니다.
그는 특히 세계 지도자 포럼(ILF)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정책 전문가들의 포럼을 지켜보면서 한국 민주주의자들의 정책적 수준과 아젠다는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세계 민주주의 정책 엑스포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자부심을 느꼈다”면서도, “다만 그 정책을 실천할 수 있는 정당 문화와 구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안 전 지사가 덴버에서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의도한 목적을 얼마나 이뤘는지는 모르지만, 미국 전당대회장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만 매달려 온 자세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기를 바랐습니다.
안 전 지사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2010년 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로 당선,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며 비교적 유연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4년 재선에 성공 후, 한국 진보세력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폭력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분명 그는 큰 잘못을 했는데, 안타깝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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