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중산층 강화해 미국을 다음 단계로…뒤로 가지 않겠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DNC) 마지막 날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드레일 없는" 폭주를 경고하며 중산층을 강화해 미국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겠다고 밝혔다. 전당대회 기간 동안 가자지구 전쟁 반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해리스 부통령은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독재자"로 칭하며 "비위를 맞추지 않겠다"고 선언해 김 위원장과의 친분을 과시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오후 40분 가량 이어진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다방면에서 진지하지 않은(unserious) 사람이지만 그가 백악관으로 돌아왔을 때의 결과는 극도로 심각하다(serious)"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일 때 뿐만 아니라 선거에서 패배한 뒤에도 혼란을 일으켰다며 2021년 1월6일 미 의회의사당 폭동을 상기시켰다. 그는 특히 지난달 미 연방대법원이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공적 행위에 대한 면책권을 부여한 것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가 가드레일 없이 미국 대통령의 막대한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상상해보라"고 경고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우린 뒤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반복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퇴행적 인물로 규정하고 자신은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미국, 미국이라는 놀라운 여정의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있다고 대조했다. 그는"강력하고 성장하는 중산층"을 건설하는 것이 "내 대통령 임기의 목표를 정의할 것"이라고 밝히며 "모든 사람이 경쟁하고 성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의 경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인도 출신 어머니가 이혼 뒤 거의 홀로 자신을 기른 성장 배경부터 검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사건 등 개인사를 풀어내며 이날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부모 이혼 뒤 "소방관, 간호사, 건설 노동자 등 노동계층 이웃"이 있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지냈고 장시간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이웃들이 자신을 돌봐줬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웃들 중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없지만 그들 모두가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이라고 언급해 이목을 끌었다. 이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 상원의원이 배우자가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녀를 기른 해리스 부통령을 "캣 레이디(cat lady·아이 없이 고양이 키우는 여성)"라고 비하하고 자녀가 없는 이들은 "나라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편협한 가족 개념을 제시한 것과 대조된다.
해리스 부통령은 부모의 영향으로 "시민권 운동의 이상에 푹 빠져 자랐"고 법률가의 꿈을 키운 것도 시민권 운동 관련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법률가 중 검사를 길을 택한 것은 고등학교 친구가 계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것을 알게 된 뒤 그와 같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연설에서 임신중지권 보호를 강조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가 재생산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대법관들을 직접 선택했다"며 임신중지권 관련해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 "간단히 말해, 정신이 나갔다"고 비난했다.
불법 이주 문제와 관련해선 지난해 국경 보안을 위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강력한 국경 법안을 제시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선거운동에 해를 입힐 것이라 보고 의회 동료들에게 협상을 무산시킬 것을 명령했다"고 비판했다.
전당대회 기간 동안 가자지구 전쟁 반대 시위대가 바이든 정부에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며 대회장 인근에서 시위를 벌인 가운데 해리스 부통령이 연설에서 가자지구 관련 내용을 언급한 것은 큰 주목을 끌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방어할 권리를 지지한다"면서도 "동시에 가자지구에서 지난 10달간 일어난 일은 파괴적이었고 너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절망적이고 굶주린 사람들이 안전을 위한 피난을 반복했다. 그 고통의 크기에 가슴이 아프다"며 "이스라엘이 안전해지고 인질이 풀려나고 가자지구의 고통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존엄성, 안전, 자유, 자결권을 누릴 수 있도록" 휴전 협상이 타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해리스 대통령 연설 중 가자지구 관련 부분에서 가장 큰 박수와 환호가 나왔다. 전당대회 첫날 연설한 조 바이든 대통령도 가자지구 전쟁 반대 시위대에 "일리가 있다"고 발언해 눈길을 끈 바 있다.
해리스 부통령은 가자지구 전쟁 외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 동맹 강화, 우크라이나 지원 지속 등 대외정책 방향과 관련해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가운데 해리스 부통령은 연설에서 "나는 트럼프를 응원하는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와 폭군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독재자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아첨과 호의로 쉽게 조종"할 수 있고 "트럼프 스스로가 독재자가 되길 원해 독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응원한다고 주장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의 상속자"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큰 특권인 미국인"이 된 데 따른 "엄청난 책임을 지켜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고 "모두가 성공하기 위해 누군가 실패할 필요는 없다"며 "통합"을 촉구했다.
해리스 부통령이 연설에서 가자지구 휴전을 촉구했지만 전쟁 반대 시위대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22일 보도했다. 바이든 정부의 가자지구 전쟁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여 온 '지지후보 없음(Uncommitted) 운동'의 공동 창립자 압바스 알라위예는 통신에 연설에서 "현재 경로에서 벗어난 용감한 리더십"을 보지 못했다며 해리스 부통령이 경합주 주민들을 설득할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시위대는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 동안 전당대회장 인근에서 가자지구 전쟁 종식을 촉구하고 바이든 정부가 이스라엘에 무기 공급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전당대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해 왔지만 <AP> 통신에 따르면 민주당 전국위원회는 이러한 요구를 21일 최종 거부했다. 이에 지지후보 없음 운동 쪽은 전당대회장 인근에서 밤샘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당대회 연설을 희망했던 팔레스타인계 민주당 조지아주 하원의원 루와 롬만이 미 매체 <마더존스>에 공개한 연설문을 보면 그는 연설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표명하고 휴전 및 팔레스타인인 학살 종식, 모든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인질 석방을 촉구하고자 했다.
연설 거부에 일부 민주당원과 지지자들이 반발하며 분열이 드러나기도 했다. 전당대회 첫날 해리스 부통령 지지 연설을 했던 당내 대표적 진보 성향 연방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인질들의 인간성을 존중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폭격으로 살해된 4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간성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연설 거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비인간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당이 연설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붙잡힌 이스라엘계 미국인 인질 허쉬 골드버그 폴린(23)의 부모는 21일 전당대회 연설 기회를 얻어 휴전 협상 타결을 촉구한 바 있다.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선언한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도 소셜미디어를 통한 성명에서 "이번 선거에서 이기고 싶다면 민주당은 오늘 밤 전당대회 무대에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의 연설을 허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전격 후보 교체로 기세를 탄 해리스 부통령은 역전에 성공해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격차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 앞서고 있다. 여론조사 분석 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가 종합한 여론조사 평균을 보면 22일 기준 해리스 부통령 지지율은 47.2%,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율은 43.6%다. 모금도 급증해 각 캠프 발표에 따르면 해리스 캠프의 지난달 모금액은 트럼프 캠프의 3배에 달했다. 20일 <로이터> 통신은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후보로 나선 지난달 말 이후 4주간 5억달러(약 6687억원)가 모였다고 모금에 대해 잘 아는 4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다만 <로이터> 는 해리스 부통령을 위한 슈퍼팩(super PAC·정치자금 모금단체) 중 하나인 퓨처포워드 회장인 천시 맥린이 지난 19일 시키고대 정치연구소 행사에서 자체 조사 결과가 여론조사보다 "덜 낙관적"이라며 방심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는 해리스 부통령 지지율 상승 주요 동력은 젊은 유색인종 유권자들에게서 나왔지만 여전히 2020년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 입성을 이끈 흑인, 히스패닉, 젊은 유권자 연합이 완전히 재건되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또 유권자들이 해리스 대통령이 경제 정책,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책 차이 등 더 세부적인 정책적 입장을 제시하길 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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