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서 바닥으로 내려온 그림, 병풍처럼 관객을 감싸다

서지혜 기자 2024. 8. 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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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아뜰리에] 'K아트 미래' 전현선의 제주 작업실
"작업환경 바뀌면 어떻게 변할까 궁금"
남편·2살배기 아이와 함께 제주살이
자유분방하게 그린 기하학적 도형들
고정관념 깨고 벽면 대신 세워서 전시
프리즈·샤넬 신예작가 3인방에 선정
한국인으론 첫 에스더쉬퍼 전속계약
설치미술가 론디노네와 내달 개인전
[서울경제]

최근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소식 중 상당수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30~40대 젊은 작가들이 해외의 대형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거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알 만한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초창기 K팝 시장이 그랬듯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글로벌 미술 시장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1989년생 전현선은 이러한 최근 미술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대표적인 MZ 작가 중 한 명이다. 지난해 열린 ‘2023 프리즈(Frieze) 서울’에서 프리즈와 샤넬코리아가 발표한 ‘나우&넥스트’ 프로젝트의 ‘넥스트(신예 작가)’ 작가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그는 그해 독일의 대형 갤러리 에스더쉬퍼가 서울과 베를린에서 동시 개최한 그룹전 ‘뒤집기’의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올해 초에는 에스더쉬퍼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에스더쉬퍼 베를린에서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 우고 론디노네와 함께 개인전(2명의 개인전이 열림)을 갖는다. 어느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고 말하기에는 정직하리 만큼 차분히 한 계단씩 밟고 올라온 작가지만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작가 전현선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의 제주도 아틀리에를 서울경제신문이 직접 찾았다.

귀한 몸이 된 MZ 작가, 제주에 둥지를 트다

전현선의 작업실은 제주 애월읍에 위치한 타운하우스 단지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며 작업하고 있다. 작가의 하루 일과는 이제 만 2세가 된 아이가 결정한다. 작가는 “아이가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생각나는 대로 작업을 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 작가는 아이가 작업 시간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시간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집중도가 높아졌다”며 “아이를 등원시킨 후 9시부터 5시까지 작업하는데 시간을 양질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의 남편은 학고재 소속 장재민 작가다. 가족이 제주에 온 계기는 특별하면서도 평범하다. 서울 은평구의 작업실에서 남편과 함께 지내던 작가는 전시 때문에 제주도에 방문한 후 ‘제주살이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작가는 “두 사람 모두 일하는 장소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게 이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아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 장점을 누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답게 자유분방한 결정이다. 그는 또한 “언제나 작업 환경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데 위치나 환경이 모두 바뀌었을 때 작업이 어떻게 변화할지도 궁금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상이 생각만큼 자유롭진 않다. 아이 때문은 아니다. 그저 작가가 ‘귀한 몸’이 됐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금 9월 13일 에스더쉬퍼 베를린에서 열리는 개인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글로벌 작가로 거듭나면서 그림을 그린 후 마르는 시간에는 영어 공부도 해야 한다. 그는 “더 큰 작업실에서 큰 의자를 두고 티타임을 하며 지내고 싶은데 오히려 시간이 없어서 밖을 구경해본 적도 없다”며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새로운 곳에 왔으니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벽에 걸린 회화, 바닥에서 관객을 만나다

전현선은 기하학적 도형을 자신만의 고유한 회화 언어로 만들어 이를 캔버스에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작가의 작품 속 중심 이미지는 대개 뿔·원기둥·팔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이다. 기하학적 도형은 추상적인 형태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회적 맥락이 없다. 작가는 이 같은 도형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보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인생에서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어려운 문제에 다가가자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도형도 그런 어려운 것들을 보류하기 위해서 그린 것이고, 도형을 두고 주변에 제가 그릴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그려가면서 계속 질문하는 여정이 나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작업실에서 새로운 작품을 제작 중인 전현선. 사진=서지혜 기자

작업실에는 높이 2m의 커다란 그림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전현선은 이런 대형 작품을 빨리, 많이 생산해 낸다. 그는 “원하는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것을 빨리 그리고 싶어서 유화가 아닌 수채를 선택했다”며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수채만한 재료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대충 그리는 것은 아니다. 처음 그려진 그림 위에 또 다른 물감을 덧대어 처음과 조금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칠하고 또 칠한다. 작가는 “빨리 그리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그려낸다”며 “그러다 보면 그림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캔버스 속 다른 이미지와 연결돼 새로운 빛을 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7월 조현화랑에 전시된 전현선의 작품 설치 전경. 사진 제공=조현화랑

작가는 이 커다란 그림들을 병풍처럼 세로로 세워서 전시한다. 회화 작품이라고 해서 그저 벽에 걸려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회화 작품을 하나의 설치 작품으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7월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10개의 대형 그림을 일직선이 아닌 둥그렇게 병풍처럼 세워서 설치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설치 방식 덕분에 당시 전시장에서는 관람객들이 10m에 이르는 그림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고 그림 밑부분을 보기 위해 쪼그려 앉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그림과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스더쉬퍼의 첫 번째 한국인 전속 작가, 세계 무대에 나선다

이 같은 파격과 자유로움 때문일까. 지금 전현선은 미술관이 좋아하는 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이미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수원시립미술관 등 국내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음 달 열리는 에스더쉬퍼 베를린 전시를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해외 활동에도 나설 계획이다.

전현선, 새벽 작업실. 사진제공=조현화랑
전현선, 과거의 그림들. 사진제공=조현화랑

당장 9월 13일부터는 에스더쉬퍼 베를린의 ‘니치(niche)’ 공간에서 개인전 ‘이해할수록 우리는 빛을 잃겠지(When you understand my secret, it becomes a ghost)’를 개최한다. 필립 파레노, 우고 론디노네, 리엄 길릭 등 세계적인 작가가 소속된 에스더쉬퍼는 2022년 서울에 처음 지점을 낸 후 한국 작가 발굴에 몰두해 왔고 올해 초 서울과 베를린에서 동시 개최한 한국 작가 단체전에서 반응이 좋았던 전현선을 첫 번째 한국인 전속 작가로 낙점했다. 베를린 갤러리의 메인 전시 공간 입구에 위치한 니치 공간은 우고 론디노네, 네이선 카터, 아네테 켈름, 율리우스 폰 비스마크 등 많은 작가들이 실험적 프로젝트나 작은 개인전을 진행해 온 특별 공간이다. 같은 기간 동안 메인 전시 공간에서는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이 열리는데 오랜 시간 에스더쉬퍼와 함께 일해온 작가와 새롭게 합류한 전현선의 작품 세계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이뿐만 아니라 전현선은 파리 장 프랑수아 프랫 상 최종 후보 3인에 포함됐으며 에스더쉬퍼 베를린을 비롯한 유럽 기관에서 개인전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해외 활동을 준비 중이다.

전시 때문에 바쁘겠지만 전현선은 요즘 드로잉을 하며 초심을 다잡는 시간을 따로 갖고 있다. 그는 “나의 작업은 흰 도화지와 물감에 아무런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어떤 형태를 그린 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시간이 지나니 관습이 생겨 특정한 형태를 반복해서 그리는 일이 많아졌다”며 “드로잉 시간을 통해 즉흥적으로 표현하며 작품을 완성하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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