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도발 이끈 건 돌아온 전통주의였다

이향휘 선임기자(scent200@mk.co.kr) 2024. 8. 2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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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無) 와중에 태어났소이다, 배넌 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브레인인 알렉산드르 두긴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책사인 스티브 배넌이 주인공이다.

두긴은 푸틴의 지정학적 야망을 배후 조종하는 미치광이 천재로 알려졌고, 배넌은 트럼프 1기 대선 캠페인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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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전쟁 벤저민 R 타이텔바움 지음,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펴냄, 1만9800원

"우리는 무(無) 와중에 태어났소이다, 배넌 씨."

배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도 용케 길을 찾아냈지요. 바로 전통입니다."

2018년 11월 세상을 뒤흔드는 두 명의 극우 사상가가 로마에서 극비리에 만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브레인인 알렉산드르 두긴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책사인 스티브 배넌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두긴은 푸틴의 지정학적 야망을 배후 조종하는 미치광이 천재로 알려졌고, 배넌은 트럼프 1기 대선 캠페인을 총괄했다. 두긴은 푸틴이 2021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상적 발판이 된 신유라시아주의의 창시자다. 트럼프의 3대 공약(해외에서 일자리를 되찾아오기, 이민자 줄이기, 해외 참전 중단)은 배넌이 조합해낸 메시지다.

이 둘은 왜 만난 것일까. 서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둘에게는 뜻하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전통주의자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전통주의자는 요즘 세대를 비판하고 오래된 문화를 선호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대문자 T의 전통주의자는 다르다. 전통주의(Traditionalism)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중세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는 사상적 흐름으로 18~19세기에 태동해 100여 년간 지하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온 철학적·영적 입장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과 유럽 등에서 반이민주의적 내셔널리즘과 결합해 급진적 극우로 흐르고 있다.

위계질서론은 전통주의가 가장 급진적인 극우파와 어떻게 만나는지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전통주의에 우파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한 20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율리우스 에볼라는 인종에 따라 인류의 위계가 정해진다고 믿었다. 흰 피부의 아리안이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인종으로 최상위며 그다음으로 피부가 검어지는 순서다. 유대인, 아프리카인, 기타 인종이 위계를 이룬다. 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며 지리적 북반구가 남반구보다 더 우월하다.

위계질서론에 따르면 아리안은 원래 북극에서 가부장적 사회를 이루고 살던 천상의 영적인 존재들이었는데 진보에 대한 맹신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싹트면서 오염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과 세속주의도 질서를 흐트러트려 세상을 암흑으로 초대한다.

저자인 벤저민 타이텔바움은 콜로라도대 민족음악학 교수로 극우정치 전문 연구자다. 두긴과 배넌이라는 두 명의 거물급 인물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그들의 정신세계 밑바닥까지 탐구한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급부상하는 우파 포퓰리즘의 사상 지도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두긴과 배넌의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옛 소련의 영향력을 복구하자는 두긴의 전략은 푸틴 정권에서 현실이 됐고 감옥에 수감 중인 배넌은 영상 팟캐스트 '워룸'을 통해 공화당의 강경한 의제를 설정하며 트럼프 2기 대선 캠페인에도 입김을 행사하고 있다. 배넌의 출소일이 11월 미국 대선을 며칠 앞둔 시점이라는 점도 공교롭다.

[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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