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의 힘과 민주주의의 위기[김유찬의 실용재정](44)
지난 10여 년간 토마 피케티를 필두로 이매뉴얼 사에즈나 게이브리얼 저크먼 같은 젊은 학자들이 불평등과 경제성장과의 관계를 집중 조명하며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이들은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한 정도를 시기별·지역별로 방대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측정했다. 소득과 자산 상위 0.1%나 0.01%에 속하는 계층에게로의 부와 소득의 집중경로와 집중도, 그 의미를 부각했다. 1명이 999명의 경제를 어렵게 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 교묘한 체제를 시장경제 혹은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게 하는 현실을 제대로 분석한 것이다. 이들은 불평등 혹은 자산축적의 경로를 밝히려고 노력하며 과세를 통한 문제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경제성장률보다 자본수익률이 높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수익률이 높은 중요한 요인으로 자본에 대한 저율과세가 꼽힌다. 미국의 예를 보면 근로소득세는 대체로 비례세적 부담구조다. 하지만 자본에 대한 저율과세 때문에 미국에서 종합소득세 부담은 소득 최상위 계층(상위 0.1%)에게, 소득 상위계층(상위 10%)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 미국의 상위 0.1%의 자산축적 경로는 장기자본소득에 대한 저세율, 지주회사(Holding Companies), 국제적 조세회피(조세피난처) 등의 요인이 크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낮은 노조조직률과 이민정책으로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도 유효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낙수효과 미작동, 세계 경험이 증명
윤석열 정부는 2024년 세제 개편안을 통해 2022년과 2023년에 이은 세 번째 ‘부자 감세’ 세법 개정안을 제시했다. 올해 세법 개정안에서는 상속세와 금융투자소득세 등 자산 및 자본소득에 대한 세 부담을 줄이겠다고 했다. 상속세 부담 완화는 불평등과 경제 양극화라는 우리 시대 최대의 경제·사회적 위기 요인을 더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 세제 개편안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안은 자본소득에 대한 과도한 혜택이다. 주주환원 촉진 세제(배당소득에 대한 분리과세 확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지원 확대 등은 근로소득과 비교해 이미 과도한 자본소득에 대한 세제 혜택을 더 확대하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하고 세수가 부족한 현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정책적 판단이다.
국민경제에서 성장은 상대적으로 소비성향이 높은 소득 하위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줄 때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성장과 세수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2024년 정부 세제 개편안이 제안하고 있는 개인들의 자본소득에 대한 세 부담 경감은 소득 상위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주는 것으로 성장과 세수의 선순환을 가져오기 어려운 내용이다. 윤석열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세제개편, 소득과 자산 상위계층을 위한 감세 정책은 ‘낙수효과’라는 가상적이고 이념적인, 경제 주변부에 미치는 전달 효과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 세계의 경험이 웅변하고 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대처 영국 총리 이후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경제의 글로벌화와 이동성 있는 생산요소인 자본에 대한 과세를 지속해서 낮춰왔다. 결과적으로 자본 및 자본소득에 대한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소득 상위 및 최상위 계층의 세금을 줄여주었다. 해당 기간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는 심각해지고 소득 중하위 계층의 실질 소득은 정체됐으며 자산점유율은 계속 낮아졌다.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그 이상의 명백한 증거가 필요할까. 이 상황에서도 윤석열 정부와 경제관료들은 낙수효과만 반복해 되뇌고 있다.
한국의 소득 및 자산 상위 0.1%의 자산축적 경로는 어떠할까. 세제가 허용하는 경로로는 주식 및 부동산의 양도소득을 포함한 전반적인 자본소득에 대한 우호적인 세제도 작용하지만, 미국과 다른 점은 법인세의 낮은 실효세율을 들 수 있다. 미국의 법인세 체계와 달리 한국은 배당세액에 대한 공제를 허용한다. 미국에서는 법인세를 납부한 후 남은 소득을 주주들에게 배당하면 이에 대해 배당세액공제 없이 다시 한번 주주 차원에서 소득세가 부과된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든다.
그 외에 법인세제에서 높게 설정된 최고세율 적용 과세표준구간, 통합투자세액공제,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등이 법인세의 낮은 실효세율을 가능하게 해준다. 법인의 대주주들은 이러한 특혜를 낮은 배당 성향, 느슨한 회계 관행의 환경에서 매우 유리하게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가업상속공제 등의 제도를 포함한 상속세제도 한국의 소득 및 자산 상위 0.1%의 자산축적 경로로 들 수 있겠다. 상법이나 공정거래법이 허용하는 경로로는 재벌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와 합병, 물적 분할 등의 기업구조변경, 다주택자들의 부동산 투자, 지주회사 등이 있다. 지주회사는 재벌그룹의 지배체계에서 과거 순환출자 역할을 대체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케티, 사에즈, 저크먼이 말하는 과세를 통한 불평등 해소는 소득 최상위 계층이 누리는 소득 대부분이 자본소득이기 때문에 이동성이 강한 성격의 자본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해 과세가 가능한가가 관건이다. 경제학의 전통적 시각에서는 조세 경쟁(tax competition) 때문에 어렵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었으나 저크먼은 과세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정책적 선택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에 대한 과세는 필요하며 다만 과세 실행을 위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제 공조로 자본에 대한 과세 실행해야
과세의 국제적 공조와 관련해 세계에서 지난 10년간 시도한 내용은 크게 보아 국가 간 금융정보의 교환과 다국적기업에 대한 15% 최저한세에 대한 논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있다. 국가 간 금융정보 교환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다국적기업의 저세율 국가로 이익 이전은 여전하다. 이를 통해 글로벌 법인세의 10% 수준의 손실이 생기는 것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최저한세는 이제 거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저크먼은 자본소득에 대한 국제적 공조를 통한 실효성 있는 과세를 위해 여섯 가지 제안을 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세계적으로 억만장자들(Billionaires)에게 2%의 자산세(순부유세)를 부과하고 다국적기업에는 법인세 25%의 최저한세를 규정해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과세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나라마다 출국세를 도입하고 국세기본법에 경제적 실질 원칙과 남용방지 규정을 빈틈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국제적으로 자산 등록제를 실시해 과세의 기본 인프라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0.1%의 사람, 1000명 중의 1명에게 도움이 되고 나머지 999명에게 해로운 세제 개편이 윤석열 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다. 1명의 이익을 위해 999명이 희생당하는 체계가 정치적으로 가능하고, 그런 효과를 가지는 세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야당이 제 역할을 착각할 때 시작된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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