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끓여낸 오리탕, ‘한겨레’와의 인연만큼 깊은 맛

김용희 기자 2024. 8. 2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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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광주 금남로 ‘맛집 한겨레’
광주광역시 동구 예술의 거리에 자리한 ‘맛집 한겨레’ 식당의 대표 메뉴인 오리탕 차림.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터줏대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서, 뭘 먹어야 합니까?”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1980년 5월20일날 밤에 여기서 군인들을 피해 한참을 도망다녔제.”

9일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이면도로에서 만난 나의갑(75) 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관장은 44년 전 5·18 당시 계엄군을 피해 도망다녔던 기억을 떠올렸다. 옛 전남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그는 늦은 밤까지 시위 취재를 하다 무차별적으로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을 맞닥뜨렸다. 광주가톨릭센터(현 5·18기록관) 옆길을 통해 금남로 이면도로로 뛰어든 나 전 관장은 문 닫힌 단골식당 문을 두드렸고 식당 주인이 받아주며 간신히 몸을 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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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 관장은 “그때는 기자증을 보여줘도 소용없으니까 급한 마음에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나 말고도 여러 명이 숨어 있었다”며 “해당 식당은 사라졌지만 금남로 골목은 아직 정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나 전 관장은 5·18기록관 뒤편에 자리한 ‘맛집 한겨레’ 식당으로 이끌었다. ‘한겨레’ 신문과 같은 이름을 쓰는 이곳은 광주에서 ‘한겨레’ 신문을 가장 지지하는 독자 중 한명인 나 관장이 즐겨 찾는 식당 중 한 곳이다.

정정례(67) 사장은 “1988년 11월 중앙초등학교 앞에 밥집 문을 열 때 이름을 고민하다 같은 해 생긴 ‘한겨레’신문을 보고 ‘한겨레’라는 이름으로 정했다”며 “뜻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창간 때부터 ‘한겨레’는 계속 구독하고 있다. 정 사장은 2000년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다른 이름의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손님을 끌지 못했다고 했다. ‘광주에서는 역시 한겨레라는 이름을 써야 된다’고 생각한 정 사장은 2009년 11월 ‘예술의 거리’에 있는 지금 자리로 식당을 옮겨 이름에 한겨레를 다시 넣었다. 손님 발길은 다시 이어졌지만 가끔 “한겨레신문 아닌가요?”라는 전화도 받고 있다고 한다.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뒤편 예술의 거리에 자리한 ‘맛집 한겨레’ 식당.

식탁 20여개가 있는 식당 내부는 소박한 모습이다. ‘예향 광주는 식당만 들어가도 그림이 걸려 있다’는 말처럼 지역 중견 작가의 그림이 벽을 따라 걸려 있었다.

대표 메뉴는 오리탕이다. 광주지역 밥집의 기본 메뉴인 김치찌개(8천원), 애호박찌개(9천원), 돌솥비빔밥(9천원)도 있지만 5·18기록관 등을 찾은 외지 손님들이 많이 찾는 음식이다.

나 관장은 “광주 북구 오리탕거리 식당가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어머니 손맛을 느낄 수 있었다”며 “5·18 기념주간 금남로를 들른 외지인들이 차로 20여분 걸리는 오리탕 거리를 가기에는 힘이 드니 이곳에서 오리탕 맛을 보고 간다”고 말했다.

6만원에 오리 한마리, 4만원에 반마리 단위로 파는 여느 오리탕집과 달리 한겨레 식당은 1인분씩 판매한다. 가격은 1만2천원이다. 함께 차리는 반찬은 깻잎무침, 김치, 어묵볶음, 도라지무침 등 6가지로 계절에 따라 다르다.

오리탕 맛은 고소한 들깨와 향긋한 미나리에서 나온다고 알려졌지만 나 관장과 정 사장은 된장이라고 강조했다.

광주 예술의 거리에서 ‘한겨레’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40여년 째 운영하는 정정례 사장.

정 사장은 “식당을 차릴 때부터 특정 브랜드의 된장을 정량만 써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비결”이라며 “재료량은 비밀”이라고 했다. 주재료인 오리는 개업 초기 대형유통업체 제품을 쓰다가 지금은 개인업자에게 매일 오전 신선한 고기를 납품받고 있다고 했다.

뚝배기에 담긴 황갈색의 오리탕은 맵고 짜지 않으면서 깊은 맛이 특징이다. 이날 오리탕에는 제철이 지난 미나리 대신 부추가 올려져 있었다. 들깻가루가 풍미를 더 했다.

고기를 찍어 먹기 위한 초고추장도 딸려 나왔다. 먹기 좋게 잘린 오리고기는 쫄깃하게 씹혔다. 성인 남성이 먹어도 서운하지 않은 양이다. 먹기 시작할 땐 국물 한 숟가락에 밥 한술이지만 어느덧 고기와 국물만 찾게 된다.

또 다른 대표 메뉴는 1만2천원짜리 반계탕이다. 닭 한 마리가 든 삼계탕과 달리 닭 반마리가 들어 있다. 주머니가 가벼운 노인들을 위한 배려다. 장기·바둑 대결 장소로 쓰이는 금남로4가역이 가까이에 있어 노인 손님들이 자주 찾고 있다고 한다.

‘광주는 식당만 들어가도 그림이 걸려 있다’는 말처럼 ‘맛집 한겨레’ 식당 내부에 걸린 그림들.

“반계탕은 식당 전 주인이 다뤘던 메뉴인데 저에게도 팔아보라고 하더군요. 오래된 식당이 즐비한 예술의 거리에는 노인 손님들이 많고 삼계탕은 혼자서 다 먹기 힘든 사람이 있으니까 꾸준하게 손님들이 찾을 것이라고 조언했어요. 1만2천원이면 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손님들이 좋아하세요.”

소탈한 성격의 정 사장은 맛집 방송 출연이나 광고는 일절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날 ‘한겨레’의 취재 요청도 하루를 고민하고 가족과 상의한 뒤에야 승낙했다. 이름이 같다는 인연 덕이었다.

정 사장은 “광고를 하지 않았어도 다녀간 손님들이 인터넷에 ‘맛있게 먹었다’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다”며 “광주와 한겨레라는 인연을 계속 이어가며 식당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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