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네이도와 우주 괴물이 상영관을 침공했다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8월 중순 극장가에는 '여름 외화 블록버스터' 정석 두 편이 나란히 상륙했다. 단순한 공포감을 넘어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초월적 대상, 그에 맞서는 주인공의 성장까지 조화롭게 버무려진 작품들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토네이도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는 《트위스터스》, '죠스(Jaws)의 우주 버전'이라 불린 전설의 SF 시리즈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그 주인공이다.
두 편 모두 과거로부터 이어진 작품의 기분 좋은 향수를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운 팬층을 포섭할 수 있는 매력을 두루 갖췄다. 지난 7월 북미에서 먼저 개봉한 《트위스터스》는 이미 북미에서만 3억 달러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개봉 첫 주말에만 44만 명의 관객을 모은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먼저 웃었다. 몸집도 내공도 만만치 않은 체급의 외화들이 오랜만에 맞붙은, 기분 좋은 '빅 매치'다.
《트위스터스》, 재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좇는 사람들
미국, 유럽 등지에서 여름에 주로 발생하는 토네이도는 모든 것을 초토화하는 강력한 회오리바람이다. 《트위스터스》는 이를 소재로 한 영화다. 기상학자들을 주인공으로 초대형 토네이도 발생 상황을 실감 나게 보여줬던 《트위스터》(1996)의 속편이자 느슨한 리부트다.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미국 이민자 가정이 낯선 땅에 뿌리내리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 《미나리》(2021)를 선보였던 정이삭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이지만, 낯선 장르로의 이동 안에서도 따뜻한 휴머니즘을 발휘하는 솜씨는 오히려 전작과의 연결성을 익숙하게 감지하게 한다.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일명 '토네이도 길들이기' 팀을 만든다. 토네이도의 위력을 낮추는 장치를 개발해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케이트는 소중한 친구들을 잃는다. 뉴욕 기상청에서 일하게 된 현재에도 그 죄책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 당시 함께 생존했던 유일한 친구 하비(앤서니 라모스)가 찾아와 자신의 팀 '스톰 파'에 합류해 토네이도를 좇는 일에 동참해줄 것을 제안한다. 고민 끝에 합류한 케이트와 하비 일행은 오클라호마로 향하고, 같은 시기 토네이도를 좇는 '스톰체이서(stormchaser)'들도 각자의 팀을 꾸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다. 자칭 타칭 '토네이도 카우보이'인 유튜버 타일러 오언스(글렌 파월)도 그중 한 명. 거대한 토네이도가 휘몰아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사사건건 부딪치던 케이트와 타일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합심한다.
《트위스터스》의 특별함은 등장인물들이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는 재난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좇는 데서 나온다. 그 같은 태도는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걸 평생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대사로 응축해 설명되기도 한다. 재난은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걸 맞닥뜨리는 개개인과 그들을 포괄하는 사회 시스템 전체의 작동 방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케이트의 시각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결국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되기까지의 회복의 서사다. 《트위스터스》의 자연은 재난의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성이 발휘되는 공간이다. 재난 안에서 사람들은 무력감과 상실감, 사랑하던 것이 삽시간에 파괴되어 버리는 슬픔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발견한다.
인물들을 도구화하거나 재난을 단순한 스펙터클로 치환하지는 않으면서도 재미는 충분히 전달하는 밸런스의 조화가 탁월한 영화다. 위력적인 스펙터클 덕분에 사운드 특화관, 4DX 등 다양한 상영관에서의 서로 다른 체험을 즐기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영리한 지점. 의외의 변칙성을 발견하는 재미보다 편안한 전형성을 즐기도록 한 연출은 단점이라기보다는 여름 블록버스터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모범적 결과로 보인다.
이번 영화는 1990년대 버전에서 나아가 유튜브 라이브, 드론까지 동시대 최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런가 하면 클라이맥스가 흑백 고전영화 《프랑켄슈타인》(1931)을 상영 중인 극장에서 펼쳐진다는 점은 의외성의 재미를 선사한다. 극장 의자에 앉아 강렬한 스펙터클을 경험 중인 관객의 입장은, 영화 속 상영관에서 토네이도와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의 상황과 흥미롭게 공명한다. 끊임없는 극장 위기론이 전 세계 영화 산업을 위축시키는 가운데에서도 '오직 극장만이 선사할 수 있는 재미'를 자신하는 장면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에이리언》 시리즈에 하이틴 호러무비의 공식을 더하면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1979년 처음 등장해 4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해온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리들리 스콧, 제임스 캐머런,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주네까지 각각 다른 연출가가 선보였던 1~4편 이후 리들리 스콧이 다시 세계관 전체를 지휘한 프리퀄 《프로메테우스》(2012)와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시리즈의 전체 세계관 안에서는 1편과 2편 사이의 시간에 속해 있는 작품이다.
2142년 식민지 행성 잭슨 스타의 광산에서 채굴작업을 하는 청년들이 꿈의 행성인 이바가로 가려고 하는 계획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다. 레인(케일리 스패니)은 유일한 가족인 안드로이드 합성인간 앤디(데이비드 존슨),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버려진 우주선에 오른다. 이바가까지 가는 9년 동안 동면할 수 있는 포드를 구하려던 이들의 계획은 곧 목숨을 건 탈출로 뒤바뀐다.
스토리라인을 단순화한 것은 이번 편의 장점이다. 최초 두 편의 스릴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너무 많은 철학이 메운 듯했던 《프로메테우스》와는 달리,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마치 '철학 대신 공포와 스릴'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세운 듯 달려 나간다. 이는 세계관을 굳이 더 확장하는 대신 끈적거리고 음습한 시리즈 특유의 공포를 그대로 불러오겠다는 전략에 가깝다. 시리즈의 여전사 리플리(시고니 위버)를 어떻게든 합류시키는 '무리수'도 부리지 않았다. 영화는 생명체의 얼굴에 들러붙는 페이스허거, 숙주의 몸에 기생했다가 가슴뼈를 뚫고 나오는 체스터버스터, 이후 허물을 벗으며 강력한 성체인 제노모프가 되는 괴생명체의 익숙한 수순을 등장시키며 심장을 조여 오는 공포를 조성한다. 이 과정에서 《이블 데드》 리메이크와 《맨 인 더 다크》(2016)로 한정된 공간에서의 공포를 영리하게 연출했던 페데 알바레즈 감독의 장기가 고스란히 발휘된다.
신선한 변주도 있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존 공식에 할리우드 하이틴 호러무비의 공식을 결합한 것이다. 영화에는 청년들이 낯선 곳으로 섣부른 모험에 나섰다가 희생된다는 클리셰가 적용된다. 독자적 개성이 돋보인다기보다 전체 시리즈의 친절한 각주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액션의 경우엔 중력을 이용해 제노모프의 혈액 성분이 강산성이라는 핸디캡을 돌파하는 참신한 장면이 등장한다. 레인이 맞닥뜨리는 가장 마지막의 크리처가 지금까지의 시리즈 중 가장 과감한 상상력에 기반한다는 점도 파격적 놀라움이다.
시리즈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온 안드로이드 합성로봇의 활약은 이번에도 인상적이다. 감정 때문에 주저하는 인간 대신 냉정한 선택들을 내리며 '반인간적' 역할을 도맡았던 기존 안드로이드와 달리, 이번 영화의 앤디는 레인과 남매 같은 존재로 엮여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온도를 만든다. 부제인 '로물루스'는 이들이 도착한 곳, 즉 우주선인 줄 알았으나 거대한 기지였던 공간이다. 동시에 형제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초대 건국신화를 쓴 인물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레인과 앤디의 관계성을 흥미롭게 유추하게 만든다.
"영화는 여전히 강렬한 경험이다"
GV에서 만난 《트위스터스》 정이삭 감독
2020년 방영한 영국 드라마 《노멀 피플》의 데이지 에드가 존스, 《탑건: 매버릭》(2022)으로 잘 알려진 글렌 파월을 캐스팅했다.
"주인공 케이트를 연기할 배우를 먼저 캐스팅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경우 《노멀 피플》과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에서 보여준 진정성 있는 연기가 매력적이었다. 모험 어드벤처는 배우의 그런 재능이 훨씬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직접 만나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더없는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렌 파월의 경우엔 미국의 한 토크쇼에 부모님과 함께 출연한 모습을 본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다정한 아들이자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직접 만나 보니 타일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할 것 같았다. 캐스팅을 고려할 때는 배우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영화의 주요 공간인 오클라호마는 토네이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전작 《미나리》의 촬영지이기도 했고, 감독의 고향과도 근접한 지역인데.
"내 어린 시절을 반영한 영화 《미나리》에도 가족이 이사한 직후 토네이도 출몰 뉴스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밤새 두려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그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토네이도 경고 알람을 자주 받았다. 토네이도에 자연스럽게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워낙 자연과 가까이 살며 성장했기 때문에 오클라호마는 내게 가장 익숙한 풍경이기도 하다. 언제나 집에 가는 듯한 편안함을 준다. 이 지역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건 언제나 내게 큰 의미다."
1996년 얀 드봉 감독 연출작 《트위스터》를 향한 이스터에그(작품에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례로 토네이도가 들이닥치기 전 모텔에서 난동을 피우는 남자를 연기한 제임스 팩스턴은 《트위스터》의 주인공 윌리엄을 연기한 빌 팩스턴의 아들이다.
"그것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이스터에그다! 그 밖에 타일러가 입고 있는 티셔츠 디자인은, 1996년 작품에서 스토리보드를 그린 지아코모 기아자(Giacomo G. Ghiazza)의 작품이다. 소 한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이미지가 원작의 핵심 장면인데, 그것만은 재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완강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특수효과팀이 토네이도에 날아가는 잔해 속에 소 그림을 한 개 끼워넣었더라. 결국에는 소를 날리긴 한 거다(웃음). 1996년 작품에 참여했던 스태프 중 이번에 함께 작업한 이들도 있다. 원작과의 연속성을 잊지 않으려 했다."
"두려움은 맞서는 게 아니라 즐기는 거야"라는 대사가 인상적인데.
"영화 속 케이트의 여정은 영화감독의 그것과 닮아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까지 수많은 장애물과 모험을 겪고, 끝내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점에서다. 처음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잘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두렵다는 건 이전에 해보지 못한 경험을 앞두고 있다는 의미이고, 도망치면 안전할 수 있지만 성장할 순 없을 것 같더라. 내가 느낀 두려움 역시 영화에 투영해 보려 했다. '뭔가를 사랑하면 평생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대사도 인상적인데, 그건 글렌 파월이 직접 쓴 것이다. 자신의 캐릭터가 '토네이도를 이해하려고 좇다 보니 어느새 토네이도가 아닌 케이트를 좇고 있는 사람'이라는 핵심을 간파했더라."
35MM 필름 촬영이라는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자연의 풍경과 배우들의 얼굴을 가장 아름답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클라호마 특유의 아름다운 초록빛, 붉은색으로 빛나는 흙길의 색감 역시 필름 촬영이기에 담을 수 있었다. 《미나리》를 찍을 때도 필름 촬영을 원했지만, 워낙 저예산이라 불가능했다."
영화 속 하이라이트의 공간은 《프랑켄슈타인》을 상영 중인 극장이다. 스크린을 뜯어 날려버리는 토네이도의 위력은 아이맥스 상영 등에 버금가는 실감을 전달한다.
"실제 토네이도로 스크린이 뜯겨 나간 극장을 촬영한 사진 한 장이 좋은 레퍼런스였다. 사람들이 안전한 도피처로 믿고 이동한 공간에서, 마침 상영 중인 영화보다 더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싶었다. 토네이도는 자연발생적 재난이지만 어떻게 보면 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괴물이라는 생각에 《프랑켄슈타인》과 조응하는 면이 있다고 봤다.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를 포함한 할리우드 고전 스튜디오들이 몬스터 영화를 제작해온 회사들임을 예우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극장 장면의 단역배우들은 모두 오클라호마 토박이들이며, 모두 살면서 토네이도를 직접 경험해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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