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푸틴의 책사들… 공통분모는 ‘전통주의’ 극단 사상[북리뷰]
벤저민 R 타이텔바움│김정은 옮김│글항아리
2018년 伊비밀회동 배넌·두긴
‘전통주의 첨병’ 닮은 꼴이지만
“中 미치광이 정권” 취급한 배넌
中 연대 강조하던 두긴과 이견
두긴 “美, 물질주의 문명 산물”
철저한 배격의 대상이었을 뿐
스티브 배넌과 알렉산드르 두긴은 지난 2018년 11월 이탈리아 로마 포폴로 광장 인근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배넌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당선을 이끈 ‘책사’, 두긴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두뇌’라고 불렸다. 배넌은 반역죄로 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두긴을 만났다. 미국 검찰이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의 개입 의혹을 한창 수사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넌은 이 책 저자와의 대면 인터뷰에서 그 만남을 털어놨다. 저자는 같은 해 12월 두긴과의 전화 인터뷰로 이들의 대화를 재구성해냈다. 인류학자로서 수년간 이들을 연구하며 사고방식을 탐구했다. 재선을 노리고 대선에 나선 트럼프 전 대통령,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푸틴 대통령의 사상적 뿌리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전통주의자 배넌 = “함께 저들에게 맞서주십시오. 전통주의자로서 부탁드립니다”. 배넌은 전통주의자라는 동류의식으로 두긴을 꾀어내려 했다. 흔히 대문자 ‘T’로 쓰는 ‘전통주의’(Traditionalism)는, 옛것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전통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 물질주의를 부정하는 시각으로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한 묶음으로 몰아내자고 주장한다. 물성(物性)이 아니라 영성(靈性) 사회를 꿈꾼다. 자유·평등 등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민주주의까지 타락의 산물이라고 본다. 프랑스 신비주의자 르네 그농·이탈리아 철학자 율리우스 에볼라 등이 이 사상을 설파했다. 배넌은 해군 시절 한 헌책방 구석에서 집어 든 ‘인간 존재와 생성: 베단타학파의 지혜’ 등을 통해 그농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전통주의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파괴 성향’이 다시 보인다. 2017년 1월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 ‘오바마 케어’ 폐지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임신중절 지원을 막는 교서 등으로 100일 만에 가장 많은 행정명령을 낸 대통령이 됐다. 저자에 따르면 배넌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파괴자” “혼란을 일으키는 자”라고 불렀다. “파국을 향해 적극적으로 돌진하는 것이 사회를 개선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전통주의자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 건설에 앞서 우선 기존 체제를 파괴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 다른 전통주의자 두긴 = 두긴은 10대 시절 그농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파시즘·나치즘·내셔널리즘을 뒤섞은 강령을 만든 ‘유진스키 서클’이라는 곳에서도 활동했다. 1997년 집필한 ‘지정학의 기초’가 러시아 육군사관학교 필독서로 채택된 것을 계기로 정권 핵심 인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러시아가 2008년 8월 조지아·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기에 앞서 두긴은 이 책에서 ‘유라시아주의’라는 신념으로 그 필요성을 주장했다.
다만 두긴이 이해한 전통주의는 배넌과 달랐다. 배넌이 두긴에게 함께 맞서자 했던 ‘저들’은 구체적으로 중국이었다. 비밀 회동 자리에서 그는 중국을 “미치광이 정권”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두긴은 중국을 연대의 대상으로 봤다. 두긴이 보기에 미국에는 되찾을 만한 전통 자체가 없었다. 두긴에게 미국은 전통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서구 물질주의 문명이 낳은 국가였다. 두 인물은 활동 스타일도 달랐다. 국가지도자에게 철학적 영향을 끼치는 선에서 멈췄던 두긴과 달리, 배넌은 선거정보 업체까지 설립해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전부터 제도 정치권에서 활동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각자의 지도자를 향한 크고 깊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데 있다. 저자는 배넌·두긴 회동을 다룬 대목에 ‘정상회담’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영원의 전통주의 = 이들의 전통주의는 나치즘·파시즘보다도 더 나아갔다. 나치즘·파시즘의 인종주의는 생물학에 근거해 흰 피부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일부 전통주의자는 ‘영혼의 인종’이라는 표현을 썼다. 피부 색깔이 아니라 수세대에 걸쳐 형성한 아리아인의 인종 특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망쳐왔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현대의 모든 이념에 저항하는 것이 전통주의자의 요점이다. 저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좌·우 정치적 스펙트럼을 과감히 두 번 접어서 합쳐버리더니 다 싸잡아 적으로 돌려버렸다”고 썼다.
배넌은 미국 의회 모독죄로 지난 7월부터 4개월간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패배에 불복한 시위대가 의사당을 점거했던 2021년 1월 6일 사태와 관련한 하원 조사위원회 출석을 거부한 결과였다. 배넌은 교도소 입구에서 “오늘 수감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지지층을 다독인 차원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의회를 파괴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한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배넌이 유력한 비서실장 후보로 거명된다. 미국 대선은 이미 보수·진보 대결에서 벗어났다. 민주주의 자체를 둘러싼 선거가 됐다. 372쪽, 1만9800원.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살기 위해 몸 던졌지만…에어매트에 뛰어내린 2명 숨져
- 월급 못 준 직원 수십명인데…일도 안 한 아내·며느리에 고액 임금 준 건설사 대표
- ‘청담동 술자리 의혹’ 첼리스트 “태어나서 윤석열·한동훈 본 적 없어”
- ‘19명 사상’ 부천 호텔 화재는 예고된 참사…객실에 스프링클러 없었다
- “인민 열렬 사랑 김정은” 글 게시 매체, 최재영 목사 창간에 참여
- [속보]스키선수 등 한국인 3명 뉴질랜드서 교통사고로 숨져…1명은 중태
- 박나래·양세형 결혼하나… “예능계 이나영·원빈 될 듯”
- 보츠와나서 2492캐럿 다이아몬드 원석 발굴…119년 만에 가장 커
- “건강했던 명문대 대학원생 딸”…양재웅 운영 병원 사망 가족, 고인 사진 공개
- ‘죽음의 항해’된 영국판 ‘빌 게이츠’의 호화요트 파티…침몰 사흘만 시신 5구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