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칠정’의 아라리…이 땅의 등골에서 우러난 소리 [진옥섭 풍류로드]
아라리는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태백산맥의 중턱에서 부르던 일노래이다.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인 평창, 정선, 강릉이 모두 아라리의 원산지이다. 이 고원에서 비탈을 일구는 일노래가 물 아래로 흘러내려 가 아리랑이 되었다. 물아래 사람들이 고마웠는지 아리랑을 부를 때,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을 아라리가 낳았다고 출처를 확실히 밝힌다.
파리하계올림픽 개회식이 유튜브에서 삭제되었다. 분분한 논란 속에 평창동계올림픽의 개회식이 다시 거론되었다. 때마침 나는 정선을 드나들고 있었고, 이미 유튜브로 평창의 개회식을 몇번 돌려보는 중이었다. 사신도와 인면조는 개막식이 끝나기도 전에 관심이 폭발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와 1218대의 드론이 만든 오륜기에 전 세계의 상찬이 쏟아졌다.
내가 꼽는 명장면은 ‘아리랑: 시간의 강’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처럼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의 메밀꽃이 프로젝션 매핑으로 피어날 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김남기 명창의 소리가 메밀밭을 흔든다. 이 출렁이는 메밀밭을 다섯 아이가 뗏목을 타고 항해하니, 시련과 극복의 민족사를 요약한 것이다. 방송 자막에는 ‘아리랑’이라 쓰여있지만, 사실은 ‘아라리’이다.
아라리는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태백산맥의 중턱에서 부르던 일노래이다.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인 평창, 정선, 강릉이 모두 아라리의 원산지이다. 이 고원에서 비탈을 일구는 일노래가 물 아래로 흘러내려 가 지금의 아리랑이 되었다. 물아래 사람들이 고마웠는지 아리랑을 부를 때,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을 아라리가 낳았다고 출처를 확실히 밝힌다. 아라리는 세계적인 히트곡 아리랑을 낳고도 쉬지 않는다. 정선에서는 더욱 번성해 강원도 무형유산 제1호가 되는데, 명칭은 익숙해진 아리랑을 붙여 ‘정선 아리랑’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우직한 정선 사람들은 아직도 아라리라 말하며, 옛 소리의 맛을 잇는다. 정선 아라리는 비탈에서 만들어진 소리라 맛으로 쳐도 메밀 맛이다. 끈적끈적함을 거부해 글루텐 프리를 선언한 메밀면, 그럼에도 후루룩 삼키면 탱탱한 면발이 콧등을 친다는 정선의 명물 ‘콧등치기’처럼, 담백하면서 삶의 찰기가 끈끈하게 묻은 소리이다. 듣노라면 높지도 낮지도 않고 끊일 듯 이어지며 쉼 없이 흐르는 노래, 분명 이 땅의 등골에서 우러난 소리이다.
동계올림픽 때문에 구절양장의 산길이 꼬치 꿰듯 뚫렸다. 그렇게 시원스레 평지로 일축한 터널을 지나니 단박에 정선 땅이다. 해발 600미터 준령에 올라앉은 땅, 첩첩산중이라 “땅이 천평이면 하늘이 천평”이다. 그 비좁은 땅에서 사람들은 “앞산 뒷산에 빨랫줄을 걸고 산다”고 한다. 이 꽉 막힌 고을에 저녁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게 아라리다. 물 한 잔만 들어가도 밀려 나오는 아라리에 인생사 오욕칠정을 다 담는다. 어느덧, 아라리가 아리랑이 되러 떠난 아우라지 나루터에 들어섰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송천과 중봉산에서 흘러온 골지천이 합류되어 아우러지기에 ‘아우라지’다.
김남기(1941년) 선생. 지구촌을 관객으로 둔 명창인데, 그저 평범한 촌로로 걸어온다. 예전 정선 사람들은 “아이 대신 아라리를 낳았다”고 했다. 자신도 화전민의 집에서 아라리로 태어났고, 사시장철 비탈에 매달려 아라리 소리로 자랐다. “화전을 일궜는데, 거둔 낟알이 비료포대 반을 못 넘어” 숨넘어가는 가난이 그 목을 담금질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약초꾼, 나무꾼, 목도꾼, 심마니, 사냥꾼으로 태산준령을 오르내렸다. 그렇게 첩첩 산을 다 넘었는데, 학교 문턱은 넘지 못했다. 결국 글자를 모르니 선생이 부르는 첩첩의 노랫말은 이미 뼛골에 새겨져 있는 거다.
“아라리를 부르는 사람들은 다 시인이야” 선생의 말대로 확실히 시인이다. ‘담뱃불이 반짝반짝해 님이 오시나 했더니, 저 몹쓸 놈의 반딧불이가 나를 또 속이네’ 이 사람 한글만 깨치면 곧바로 시인이다. 어디 그뿐인가, ‘당신은 왔다가 그저 간 듯하여도, 삼혼칠백(三魂七魄) 맑은 정신은 뒤를 따라갑니다’ 이 은근한 문장이라면 안 넘어갈 사람이 없을 듯하다. ‘사발이 깨지면 두 동강이 나고, 삼팔선이 깨지면 하나가 된다네’ 이 사람 하산하여 선거 유세를 해도 되고, ‘간다지 못 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정거장 마당에 연락선이 떴다네’ 이 정도 입심이면 악극단 사회자도 될 수 있다.
대개 노래는 후렴에 정체성이 담긴다. 정선 아라리의 후렴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가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이다. 그러나 후렴을 선창 뒤에 바로 넣는 게 아니다. 오로지 선창과 선창을 서로 주거니 받다가, 시의 밑천이 바닥날 즘에 한번씩 후렴을 넣는다. 그렇게 시를 쓰는 일이 주가 되니 시인이란 말이 맞는 거다. 후렴 할 겨를 없이 조달한 무명 시인들의 방대한 가사를 아리랑연구소 진용선 소장이 발품으로 수집했다. 그의 ‘정선아리랑 가사사전’에 따르면, 정선 아라리는 지금까지 채록된 것만 2만여수가 넘어, 단일 민요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다고 한다.
동계올림픽 이후 아우라지에 아리나루관이 지어졌다. 전시관에는 아우라지 뗏목과 동계올림픽 관련 유물이 전시되었고, 개회식에서 소리하는 김남기 명창의 밀랍 인형이 세워져 있다. ‘떼’라고 부르는 뗏목은 정선의 소나무를 한양으로 나르던 옛 운송법이다. 아우라지에서 떼를 엮어 조양강으로 흘러 동강을 지난다. 떼꾼들은 “아침밥이 사잣밥”이란 말처럼 무시무시한 여울에서 목숨 건 래프팅을 하였다. 살아남아 마포나루에서 나무를 넘기면 어마어마한 거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떼돈 번다”는 말이 바로 예서 유래가 되었다.
1865년에 시작된 경복궁 중건 때, 이 뗏목에 강원도의 일노래 아라리가 따라가 공사 현장에서 대유행했다. 이를 한양풍으로 바꿔 부른 ‘아리랑타령(구 아리랑)’이 나왔고,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한 호머 알버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이라 했다. 이 아리랑의 영향으로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본조 아리랑)’이 나왔다. 아리랑은 식민지 백성의 숨소리가 되었고, 해방 공간에서는 메아리가 되어 산하에 가득 찼다. 마침내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공기가 된 것이다.
1951년 재즈의 거장 오스카 패티포드가 위문공연으로 한국에 왔다. 야전 화장실에서 용무보다 밖에서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는 선율에 매료되었다. 통역병은 아리랑이라 알려주었는데, 그는 ‘아디동’으로 들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52년 아디동 블루스(Ah Dee Dong Blues)를 음반으로 냈다. 6·25동란은 민족사의 불운이었지만, 19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한국의 아리랑은 전 세계로 전송된 것이다. 재즈가 되고 팝송이 되고, 행진곡이 되고 찬송가도 되었다.
2012년 한국의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4년에 북한의 아리랑도 등재되었다. 그리고 2018년 동계올림픽에서 남북한 단일팀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아리랑으로 공동 입장했다. 1분 뒤, 이 아리랑의 원조가 아라리라며 김남기 명창이 전 세계를 향해 홀로 목청을 돋운 것이다. 연출가 양정웅은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기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소리의 민낯으로 승부한 무반주의 2분, 그러나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선율은 전율이 되어 지구촌에 전파되었다.
지난 8월1일 정선 아리랑센터 아리랑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칠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다 몰려온다” 선생의 소리가 마치 배라도 한 척 지나가는지 가슴에서부터 고동을 쳤다. 비탈에서 단련된 폐활량이 거뜬하게 밀어 올려주고, 목을 대문처럼 활짝 여니 통성이 쏟아졌다. 비음 없이도 찡한 이유가 바로 비탈의 힘이었다. 마지막 후렴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에서 ‘아’나 ‘이’의 모음에서 온몸이 텅 비게 우는 매미 소리가 났다.
“처서는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는 처서도 혹서다. 피서가 필요하다면, 국가유산진흥원이 만든 ‘국가유산채널’에서 ‘K-ASMR 메밀꽃 필 무렵’을 찾아보시라. 김남기 선생과 부인 변춘자 여사가 메밀을 디딜방아로 찢어 면을 만드는데, 싸르륵싸르륵한 소리가 ‘자율 감각 쾌락 반응’으로 일품이다. 김남기 선생이 몇차례 아라리를 부르는데, 목 상태가 동계올림픽 때보다 좋다. 장담컨대, 그 소리만 틀어두면 이미 가을 속이다.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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