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초록빛 생명도시였다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다다랐을 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80m 높이의 51층 빌딩 꼭대기에는 허브와 오이 등을 키우는 식용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요리사가 시금치를 수확하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녔다. 옥상층 레스토랑이 이 정원에서 키운 각종 작물로 음식을 요리한다는 안내문도 있었다. 이달 초 찾아간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의 캐피타 스프링 빌딩 풍경이다. 놀라움은 이뿐 아니다. 건물의 17층부터 20층까지에는 35m 높이로 뚫린 ‘그린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정원이 있었다. 나선형 산책로 주변으로 무려 130여 종의 식물 8만 본이 심어 있어 숲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식물을 품은 빌딩
싱가포르는 동·식물과 공존하는 정원 도시다. 트렌디한 싱가포르를 보고 싶다면 2021년 완공된 캐피타 스프링 빌딩에 가볼 것을 추천한다. 싱가포르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초고층 빌딩이자 ‘스카이라이즈 그리너리(Skyrise Greenery)’의 대표 사례다.
싱가포르에 식물이 우거진 건물이 많은 것은 적도의 좁은 땅에서 살길을 모색하던 싱가포르 정부가 2009년부터 스카이라이즈 그리너리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벽면과 옥상에 녹지를 조성하는 기업에게 설치 비용의 최대 50%를 인센티브로 지급한다. 파크 로열 컬렉션 호텔과 창이공항의 복합단지인 주얼 창이도 이 방식으로 건물에 녹지를 가꿨다.
스카이라이즈 그리너리는 기후·생태·사회적 회복력을 높이기 위한 싱가포르의 범국가적 10개년 계획인 ‘싱가포르 그린 플랜 2030’의 핵심 기둥이다. 싱가포르의 ‘자연 속 도시(City in Nature)’ 비전에 따라 도시에 더 많은 나무를 심겠다고 한다. 초록빛 건물은 매력적인 동시에 도시의 온도를 낮춘다. 캐피타 스프링 빌딩은 JP모건 등이 입주한 사무용 건물이지만 그린 오아시스와 옥상 정원은 대중에게도 열린 공간이다. 예약하면 누구든 둘러보며 정원 도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싱가포르 북부 만다이 야생 보존지역에 지난해 문을 연 ‘버드 파라다이스’도 올해 ‘스카이라이즈 그리너리’의 대표 사례로 선정돼 찾아가 봤다. 주롱 지역에 52년간 있던 새(鳥) 공원이 이전한 곳으로, 400종의 새 3500마리가 사는 아시아 최대 규모(17만㎡)의 새 공원이다. 펭귄들이 아장아장 걷는 모습, 야생의 숲속을 친환경 식재 매트 등으로 구현한 환경에서 새들이 멜론을 먹는 모습,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직원들이 정성껏 돕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열대지방 새 소리가 행복감과 함께 마음속에 퍼졌다.
●싱가포르에서 ‘초록의 일상’
여행은 숙소를 고를 때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초록의 아침을 맞을 수 있는 장소를 고심해 골랐다. ‘모노클’과 ‘월페이퍼’ 등 세계적 트렌드 잡지들이 추천한 3성급 숙소다. 숙박 예약 사이트에 ‘화장실이 야외로 연결돼 방에 벌레가 다닌다’는 후기가 있긴 했지만, 일반 호텔과는 확연히 다른 개성이 있어 보였다.
머리맡에 일렁대는 초록빛 나뭇잎이 마음을 너그럽게 해줬기 때문일까. 아주 작은 개미를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도심 속 오아시스같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다. 일과를 마치고 오차드 로드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의 숙소로 돌아올 때면 마치 현지인의 평화로운 퇴근길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숙소를 잡을 땐 모르던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인 리콴유(李光耀·1923~2015)가 생전에 살던 집이 불과 10m 이내 지척이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지금의 초록빛 싱가포르를 이룩한 리콴유를 떠올렸다.
숙소에서 가까운 포트캐닝 공원은 독특한 열대 식물과 예술이 우거진 보석 같은 도심 속 공원이었다. 시민들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하는 이 공원에는 유명한 나무 터널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강변으로 내려가 로버슨키 일대 공원을 호젓하게 거닐어본 것도 좋았다.
비 내리던 일요일 아침에는 싱가포르 식물원 근처 뎀시힐로 향했다. 19세기 영국군의 캠프로 사용됐다가 이제는 세련된 카페와 갤러리 등이 들어선 숲속 마을 같은 지역이다. ‘P.S.카페’에 들어서자 빗물을 머금어 초록이 더욱 선명해진 나무들이 통창을 통해 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카푸치노 커피를 시켰더니 우유로 나뭇잎 모양을 띄워 내왔다. ‘자연을 고객에게 더 가까이’라는 철학을 가진 이 상업공간은 시내 여러 매장에서 수직 녹화를 통해 무성한 실내 녹지를 선보인다.
●정원으로 돌보는 정신 건강
싱가포르는 정원의 치유를 이론에 근거해 강조한다. 가드닝을 테마로 한 공원인 ‘호트파크’에는 2016년 문을 연 싱가포르 최초의 치유 정원(Therapeutic Garden)이 있다. 인간의 주의력은 자연환경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주의력 회복 이론’과 자연이 심리적 회복을 가져온다는 ‘스트레스 감소 이론’을 배경으로 조성했다는 설명이다.
그 정원에 들어서니 어디선가 졸졸 물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바위틈 사이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파스텔 색상의 꽃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다양한 질감의 잎사귀들을 만져보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조각품을 천천히 느끼고 감탄해보세요.’ 싱가포르의 치유 정원은 쾌적한 정원에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가드닝 프로그램에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심신의 회복을 돕는다.
서울의 한강공원 같은 싱가포르의 이스트 코스트 파크에 있는 ‘KPMG 웰니스 가든’도 3년 전 치유 정원을 조성했다. 글로벌 회계법인 KPMG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차원으로 참여한 정원이다. 싱가포르 국립대 건강시스템(NUHS), 알츠하이머 협회와 협업해 전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민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현재 13곳인 치유 정원을 2030년까지 30곳으로 늘린다는 목표다. 아이들부터 어르신까지 두루 정원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미래로 향하는 정원
싱가포르 식물원은 싱가포르 국민의 자부심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1859년 설립된 싱가포르 식물원은 오전 5시부터 자정까지 문을 열어 조깅과 피크닉을 위해 찾아오는 시민들이 많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계 식물원 중에서는 영국의 큐 가든,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 식물원에 이어 세 번째다.
싱가포르 식물원에는 여러 주제의 정원이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난초 전시원인 ‘내셔널 오키드 가든’이 그중 제일로 꼽힌다. 이곳에서 다양한 난초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이 식물원은 엘리자베스 여왕 등 전 세계 유명인사 방문객들의 이름을 난초에 붙이는 ‘VIP 난초 프로그램’의 명성이 높다.
싱가포르 식물원이 싱가포르 정원의 근간이라면 2011년 문을 연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싱가포르의 녹색 비전을 드러내는 미래형 정원이다. 연중 무더운 날씨에 상관없이 서늘한 실내에서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신의 한 수다. 그 안에서 쿠사마 야요이와 브루노 카탈라노 등 쟁쟁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슈퍼트리 그로브’라는 이름의 거대한 인공나무는 태양광 패널과 빗물 수집 시스템을 갖춘 첨단 과학 구조물이다.
플러턴 베이 호텔의 루프톱 ‘랜턴바’에서 마리나 베이 샌즈 주변 야경을 감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싱가포르에 머무는 동안 ‘생명다양성’, ‘공동체’, ‘미래’라는 세 단어를 참 많이 들었다는 사실을. 요즘 싱가포르는 고령화 사회에서 공동체가 참여하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의 도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고민이 요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싱가포르 여행이 준 선물일 것이다.
싱가포르=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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