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이 정책이 되는 순간 [세상읽기]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티베트의 밀교에 깊은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자이면서 지정학자였던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난 때는 1919년이다. 히틀러는 생존권을 잃은 독일인이 군사적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독일의 생활권(Lebensraum)을 확보해야 한다는 하우스호퍼의 주장에 매료되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사는 곳으로 국경의 범위를 확대하자는 구상은 나치의 실질적 정책이 되었다. 1933년에 나치당의 군사고문이 된 하우스호퍼의 구상에 따라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한다. 역설적으로 히틀러는 러시아와 강화를 주장하는 하우스호퍼와 결별하게 된다. 세계는 끔찍한 2차 대전을 겪고 나서 지리적 요인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는 지정학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지정학이 세계화 시대에도 통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요건을 갖춘 학문인지도 의문이지만, 정치 지도자가 지정학을 잘못 사용하면 끔찍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최근 분출되고 있는 역사와 이념 논쟁의 배후에는 20세기 식의 지정학이 있다. 어쩌면 이론이랄 것도 없는 이 사이비 담론은 지난 30여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촉진해온 한반도 주변에 심각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새로운 지정학은 한국이 일본과 정치·군사적으로 연대하여 인도·태평양과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대륙 세력과 절연하는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말이다. 이 복음을 전파하는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의 김태효 1차장은 교수 시절에 기고한 논문에서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은 마치 과거에 소련에 했던 것처럼 중국이 미국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제는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잘 지내면서 모호한 외교를 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곧 쓰러지거나 망할 중국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한·미·일이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퇴출하는 연합을 달성하자는 것이 새로운 지정학의 핵심이자 요체다.
냉전 이후 형성된 동북아 평화·번영 질서를 급진적으로 바꾸겠다는 이 새로운 지정학이 현실적 가정에 기초했다거나 실증적으로 검증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지정학자들은 한·미·일 연합이 한국의 생존전략이자 미래 번영의 토대가 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거나 책임 있는 설명을 내놓은 적도 없다. “중국은 곧 망한다”는 막연한 믿음에다가 일본 우익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가세하고 역술인 천공의 ‘2025년 통일론’까지 뛰어든 지정학의 잡탕들은 우리 생존의 기반을 교란하고 지성 사회를 혼란과 분열로 이끈다. 이 속에서 한번도 제대로 균형을 잡아보지 못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9월에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는 세력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이라고 낙인찍었다. 그리고 올해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이르기까지 나치식 사상운동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발언이 쏟아지는 동안 국민들 사이에서는 전쟁의 불안이 안개처럼 퍼지고 있다.
사실 지정학에는 제국과 영웅의 이미지로 그려진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상실감이 커지는 시대에 더 커진 자신의 미래란 권력자에게 미륵의 세계와 같은 황홀경이다. 그러나 그 망상이 이론화되는 과정을 생략하고 정책으로 바뀌는 순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1941년에 경제가 추락하고 에너지 공급망이 막힌 일본은 동인도로 진출하여 그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미국의 발목을 잡으려고 먼저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가 바로 망상이 정책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일본의 우익이 80여년 전의 인도 진출에 대한 꿈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켜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엄연히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지난 잃어버린 30년에 생존의 불안이 커진 일본 우익이 제국에 대한 추억, 아시아 지도국으로서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1941년의 지정학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미국과 한국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일본 우익에게 “중국은 망한다”며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 한국의 집권 세력이야말로 얼마나 기특한가. 게다가 역사 문제에서도 ‘일본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한국의 안보 책임자로부터 일본은 감동을 넘어 식민 시대의 영광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망상이 정책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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