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승리하고 역사는 발전한다”던 ‘김대중 정신’ [책&생각]

양선아 기자 2024. 8.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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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김대중도서관과의 구술 인터뷰
어린 시절 일화 등 재임 전 내용 많아
각종 고난 속에서도 ‘원칙과 철학’ 지켜
배우고 성찰하는 ‘인간 김대중’ 감동적
김대중 전 대통령의 1차 미국 망명 중 강연하는 모습(1972). 김대중도서관 제공

김대중 육성 회고록
김대중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기획 l 한길사 l 3만3000원

여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치인은 ‘김대중 정신’을 얘기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를 맞은 지난 18일, 여야 정치인들은 대거 추도식에 참석해 저마다의 ‘김대중 정신’을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전 김대중 평화센터를 방문해 “대통령이 되면 김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들 구호처럼, 하나의 레토릭처럼 ‘김대중 정신’을 이야기하지만, 정치 지도자이자 세계적 지도자였던 김대중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 정신을 삶 속에서 구현해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최근 출간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 정신’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그 정신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1924년 전라남도의 섬 하의도에서 태어나 2009년 서거하기 전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체 삶과 사상을 오롯이 담았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진은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구술인터뷰를 진행했고, 녹취록 전체를 정리·편집·윤문해 이 책을 출간했다. 시대별로 구성돼 있어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연결돼 역사 공부가 되고, 문답 형식으로 정리돼 있어 명쾌하고 이해하기 쉽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전적 기록은 1편의 미발행 원고와 이번 책을 포함한 총 5종의 책이 있다. 구술사 인터뷰에 참여한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사료연구담당은 “이 책이 다른 자서전과 다른 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사와 관련해 새로운 얘기가 많다는 것”이라며 “첫번째 부인 차용혜 여사 사인 병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온다거나 일제강점기 학생 시절 일화 등이 그 예”라고 설명했다. 구술채록팀은 다른 사람들에게 교차 검증 가능한 대통령 재임 시절보다 김 전 대통령만이 말해줄 수 있는 재임 이전 시절에 대해 질문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듯,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하의보통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4학년때부터 신문을 보면서 일본 내각의 주요 인사들 이름을 써서 외우고 다닐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할 때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봤는데 수석 합격했다. 상업학교 2학년 땐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김대중의 웅변은 일본의 대의사가 의사당에서 한 것 못지않다.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뛰어난 언변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의 연설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싹이 텄고,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독서로 점점 더 커졌음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목포공립상업학교는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절반씩 뽑았는데, 일본인 학생이 김대중에게 시비를 걸고 주먹으로 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씨름부였던 김대중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을 건드린 일본인 학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일로 일본인 상급생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네가 일본인에게 저항한다면서?”라며 죽도록 때리기도 했다. 이처럼 육성 기록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8·15 해방 직후 상황, 6·25 전쟁, 이승만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역사적 변곡점마다 개인 김대중과 정치인 김대중이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한 시대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3년 케임브리지에 거주할 때 스티븐 호킹 옆집에 살았다. 이 사진도 이번에 최초 공개됐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책 전체를 읽고 나면 무엇보다도 정의와 역사 발전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과 각종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그는 삶과 정치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었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1980년 9월17일, 전두환 군부 정권은 김 전 대통령에 내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사형을 선고한다. 그전에 그는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가혹 행위에 대한 질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이 심했을 때 끌려가서 구타를 당한 적이 많았는데,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이 더 괴로워요”라고 말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면 나중엔 그들이 조작한 내용이 사실처럼 들렸다고 고백한다. 그런 고통을 겪고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당하지만,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최후진술에서 정치보복 금지와 용서와 화해를 강조했다. 당시 최후진술에 대해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있어서 누구든지 악을 행할 수 있”는데 “악을 행한 사람도 개심하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제는 “악이 발현되기 쉬운 환경과 조건”이고 따라서 “법과 제도의 개혁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으로 고통을 이겨냈다. 그는 “유한한 인간의 시간으로 보면 당장은 정의가 망하고 역사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정의가 승리하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결론을 긴 사색 끝에 내렸다고 말한다. 입말체로 쓰인 이 책을 읽다 보면 김 전 대통령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서술어가 눈에 띄는데 “배울 수 있었어요” “깨달았어요”가 그것이다. 아무리 힘든 시련도, 심지어는 수감 생활마저도 그를 통과하면 ‘배우고 깨닫는 무엇’으로 바뀐다는 것을 독자는 알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유연했고, 열려 있었으며, 실사구시를 중시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하는 데에는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좌표를 잃고 권력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됩니다. 무엇보다 원칙과 철학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정치는 실질적인 결과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뤄내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과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합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강조한 대목을 보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원칙과 철학은 없고 권력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많은 현실에서, 또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어른이자 한반도 평화를 이끈 ‘인간 김대중’의 매력에 푹 빠져들도록 만든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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