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개의 우주를 보았지요” [책&생각]

한겨레 2024. 8.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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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를 찾아서 | 장혜경 번역가
소설부터 철학서까지 230여권 옮겨
“가는 책 안 잡고 오는 책 안 막아”
한문 배제, 아름다운 우리말 살려
장혜경 번역가는 고전 소설부터 자기계발, 역사, 철학, 심리까지 전방위적인 분야에서 230여권의 독일어권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혜경이는 독일어 공부만 한대요~”

친구들은 독일어 선생님만 지나가면 큰소리로 외쳤다. 고교 시절 독일어 선생님을 짝사랑해서 독일어 공부만 열심히 하다 보니 독일어를 잘하게 됐고, 잘하다 보니 좋아하게 됐고, 좋아하다 보니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연세대에서 학사를 마친 뒤 석사과정에선 동독 문학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에선 독일 페미니즘 작가를 연구했다.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독일 하노버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오랜 공부를 마치고 강단에 섰지만, 강의보다는 번역이 더 적성에 맞고 재미있어서 전문 번역가로 방향을 틀었다. 장혜경 번역가는 1997년 첫 번역작 루이제 린저의 ‘아벨라르의 사랑’을 펴낸 이후 지금까지 230여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말 찾기가 재밌잖아요. 원작의 그 말에 딱 맞는 우리말을 찾을 때의 쾌감과 희열이 있거든요. 지금도 번역 교정본을 읽을 때 술술 읽히면 ‘누가 이렇게 번역을 잘했지?’ 이러면서 읽는데, 그게 너무 행복하죠.”(웃음)

‘독일인의 사랑’ ‘변신’과 같은 고전 소설부터 자기계발, 역사, 철학, 심리까지 독일어 번역의 전방위적 분야에서 역자 이름을 남겼다. 번역 기준에 대해선 오랜 ‘구력’을 자랑하는 베테랑다운 답이 돌아왔다. “저는 운명론자예요. 가는 책 안 잡고 오는 책 안 막아요. 책을 검토해 보고 ‘이 책은 번역하기 쉽겠네’ 하며 수락해도 막상 번역해 보면 어렵거든요. 책이라는 게 자식처럼 나에게 뽑을 수 있는 ‘뽕’은 다 뽑습니다. 세상에 쉬운 책은 없어요. 그래서 책을 보고 번역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일정만 맞으면 합니다.”

그렇게 출판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덕에 그가 번역한 책들은 한국 출판시장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요즘 한국 출판 시장의 키워드가 ‘심리’인 만큼 최근에는 심리책 작품목록이 가득하다. ‘불안하다고 말해요, 괜찮으니까’ ‘내 어깨 위 죄책감’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소중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등을 통해 불안부터 죄책감, 무기력, 우울증까지 다양한 심리 처방전을 발급해주었고, 사회심리학의 거장인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 의존성 성격 장애일 때’ ‘가까운 사람이 경계선 성격 장애일 때’ ‘가까운 사람이 자기애성 성격 장애일 때’ 등 성격 장애 시리즈는 국내 심리학 출판 텃밭을 더욱 단단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문학에서 철학까지 인문학 영역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했지만 장 번역가가 가장 아끼는 책은 ‘나무수업’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성정 때문이다. 독일의 산림 전문가가 쓴 이 책을 ‘애서가’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읽고 에스엔에스에 정성스러운 독후록을 올려 화제가 됐다. “‘나무수업’은 취임 초 어느 분이 좋아하는 구절에 밑줄 치고 메모까지 붙여서, 대통령이 읽으면 좋겠다며 보내온 책입니다. 나무들이 이웃의 약한 나무에게 양분을 나눠주며 생존을 돕는다는 숲과 나무의 경이로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나무들 사이의 우정과 복지 네트워크,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나무들의 놀라운 비밀. 환경에 적응하며 숲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나무들의 함께 살기는 인간에게도 많은 지혜를 줍니다.”

평생 독일어권 책을 읽고 옮겨왔지만, 그는 일과 상관없이는 오직 한국 소설만 읽는다. 그는 “특히 요즘 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 많거든요. 백수린 작가, 조해진 작가 등의 작품을 읽으면 황홀하지 않나요? 특히 백수린 작가의 ‘참담한 빛’이라는 소설을 읽을 때는 막 단어가 빛을 내면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죠.”

남다른 우리말 사랑 덕분에 그의 번역은 한문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최대한 살린다. 덕분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독일어책들도 그의 손을 거치면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책처럼 술술 읽힌다.

한창때는 번역 에이전시도 운영하며 1년에 10권씩 번역했지만, 지금은 건강을 고려해서 2달에 1권 정도 번역한다. 번역가로서 산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후회하거나, 다른 길을 모색해본 적도 없다.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그 우주를 200개 넘게 본 셈이죠. 번역가는 책을 해부해가며 뜯어가며 읽는 사람인데, 그렇게 농밀하게 200여개의 우주를 봤으니, 미약하게나마 우주의 파편 정도는 제가 취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정말 복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우스개로 수능 다음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저는 과거로 돌아가도 번역을 하며 살 것 같아요.”

단어를 ‘별’처럼 느끼고 책을 ‘우주’처럼 느끼는 그의 눈빛은 별보다 더 반짝반짝 빛났고, 그의 미소는 우주보다 더 넉넉해 보였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제법 성공한 삶을 이룬 뒤 공황상태와 번아웃을 겪은 저자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을 알려준다. 장 번역가는 “서양에선 드문 불교심리학 책으로, 생각, 감정, 과거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나를 받아들이는 법과 함께 일상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명상법도 알려준다”고 추천했다.

페터 베르 l 갈매나무(2024)

충만한 삶, 존엄한 죽음

‘인생 수업’ ‘상실 수업’ 등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유명한 ‘죽음학의 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강연집으로, 임종을 앞둔 수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깨닫게 된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강연 4편을 선별했다. 장 번역가는 “죽음에 대한 책이지만 실은 삶에 대한 책이며, 번역하는 내내 영광이었고 벅찬 마음이었다”고 고백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l 갈매나무(2020)

세상의 모든 균류

식물도 동물도 아니지만, 자연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균류의 신비한 세계로 안내한다. 다양한 버섯의 신비로운 생물학적 특징뿐만 아니라 진귀하고 재미난 뒷이야기와 채취법까지 풍성하게 전한다. 장 번역가는 “버섯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지, 버섯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평했다.

로베르트 호프리히터 l 생각의집(2023)

숲에서 1년

노르웨이 저널리스트이자 여행 작가인 저자가 매달 하루씩, 1년간 숲에서 지낸 숲속 생활기이다.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별을 보며 잠이 들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햇살과 바람을 느끼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장에 담았다. 장 번역가는 “내가 한 번역에 반해서 교정지를 읽으면서 너무나 행복했던 책”이라고 귀띔했다.

토르비에른 에켈룬 l 심플라이프(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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