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실종’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사형자 명단에 없고, 뚜렷한 병사 기록도 없어

오는 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해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문 : 당신은 누구냐?
답 : 나는 경기도 인천 가까이 있는 OOO 소속 소위 김종철이다. 지난 60년도에 디(D)고등학교를 졸업, 61년도에 입대했다. 고향은 대전시 성남동이고,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이 살고 있다.
문 : 난동 동기는?
답 :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살기가 싫다.
문 : 주동자는 누구인가.
답 : 나다. 낮 12시에 부대에서 24명이 나와 인천 송도 부근에서 잠시 해수욕을 하고 주안으로 나와 버스를 탈취, 내가 직접 운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대방동 삼거리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유한양행 앞까지 오는 동안 몇 명은 뛰어내리고 대부분은 유한양행 앞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나도 죽으려고 수류탄 안전핀을 뺐으나 복부에 파열상만 입고 살아났다.
문 : 현재의 심경은?
답 : 죽으려 했는데 우리들의 이번 난동의 동기 등에 대해 지금 말할 순 없으나 후에 밝혀질 것이다.
1971년 8월24일치 경향신문 기사다. 부상으로 영등포시립병원에 입원한 두 ‘난동 특수범’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실미도 공작원에 대한 유일한 인터뷰인데, 주인공은 실미도 공작원 김종철이다. 또 다른 공작원 이서천은 기자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만 했다. 문제는 김종철의 경우 이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서천은 동료 공작원 임성빈·김창구·김병염과 함께 구속돼 속전속결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1972년 3월10일 사형집행) 김종철은 사형집행자 명단에 없다.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기록도 없다. 김종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몇 년 전 공군본부에서 형에 대해 사망신고를 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하지만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7월31일 저녁, 전북 익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공작원 김종철의 동생 김종억(69)씨가 말했다. “사망신고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그냥 어쩌다 보니 지나갔네요.” 김종억씨에게 김종철은 7남매 중에서 12살 터울 나는 둘째 형이었다. 1943년생으로, 살아있으면 여든하나. 그 형님이 설마 생존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선뜻 사망신고를 하러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53년 전 이맘때였다. 김종억씨는 16살 때인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이 난 직후 대전시 성남2동의 집으로 새까많게 몰려온 기자들을 기억한다. 대전이었지만 변두리 시골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들로 동네가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간첩이 아니냐는 말들이 오갔고, 부모들은 그저 쉬쉬했다. 가족 중 아무도 김종철이 있는 서울 영등포시립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이들에게는 농촌진흥청에서 검사원으로 일하는 첫째 아들 김점산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형제 중에 변변한 직장에 다니는 자식은 김점산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종된 둘째 아들이 ‘난동 특수범’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정말 오로지 김점산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가족들은 아무도 김종철을 찾지 않았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이렇게 썼다. “아버지(60)와 어머니(49)는 ‘4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미친 짓을 하다니’하며 울음을 터뜨렸다.(중략) ‘난동의 주범이 내 아들인가 확인해보고 싶어 면회라도 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 가지도 못 한다. 죄 진 대가를 받아도 싸지만 저 하나로 인해 많은 목숨을 잃게 한’이라고 통곡했다”고 썼다. 또한 “(김종철의 가족들이) 셋방에서 날품팔이로 살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이 난 직후 최초로 자신들의 혈육이 실미도 공작원에 끌려갔음을 알게 된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서천도 언론에 노출됐지만 혈육인 여동생 이향순과는 연락 두절 상태였다. 나머지 공작원의 가족들은 2003년 ‘실미도’ 영화가 나오고 국방부 실미도 티에프(TF)단이 꾸려진 뒤에야 실종된 이들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김종억씨는 둘째 형 김종철이 형제 중에 키가 가장 작지만 ‘깡다구’가 있었다고 했다. 정겨운 추억은 없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익산에서 중학교를 나온 형은 자리를 잡는다며 대전에 먼저 갔고, 뒤따라 모든 식구가 대전에 갔지만 김종억씨와 함께 산 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형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식당 일을 하다가 건빵공장에 무연탄 대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형을 떠올리면 건빵과 오토바이가 생각난다고 했다. 형이 처음에 시작한 식당은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식당을 이어받았다. 형은 언젠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김종억씨가 13살이었고 형 김종철이 25살이던, 1968년의 어느 날이었다. 실미도 공작원이 된 줄은 알 리 없었다.
김종철은 경향신문 인터뷰 사진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본인이 탈취해 서울로 몰고 온 시내버스의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소위라고도 했다. 하지만 김종철은 소위도 아니었고, 사병도 아니었다. 군 당국은 실미도 공작원들에게 군인 신분을 부여하지 않았다. 부대원 모집과정에서는 “장교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국방부 과거사위) 조사보고서에 실린 공작원 사상자 명단에 김종철은 고향이 군산이며 ‘1971년 8월23일 유한양행 앞 자폭으로 부상 후 사망’이라고 적혀있다. 사망장소는 항의원으로 돼 있다. “부상을 입은 임성빈, 김창구, 이서천, 김종철 등 4명이 항의원에 후송되었는데, 김종철은 이튿날 사망하였다”는 서술도 있다. ‘항의원’은 항공의학연구원의 약자로 공군 소속 병원을 이르는 말이다. 영등포시립병원에 입원시킨 뒤 언론에 노출되자 병원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다음날 사망했을까. 머리에 붕대를 감았지만 기자와 멀쩡하게 인터뷰를 해놓고 이튿날 사망했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2005~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실미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상식적으로 언론을 통해 이미 주소와 가족이 다 알려진 공작원을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부상 정도도 경상이었다. 절대 부상으로 사망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종철이 사망했다는 원자료는 국방부 과거사위가 꾸려지기 전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꾸린 조직이었던 실미도 사건 티에프단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사위가 조사한 건 따로 없었다”고 했다.

김종억씨는 육군본부 유해발굴단이 공작원들의 시신 매장지인 경기도 벽제동 서울시립묘지 1-2지역에서 유해 발굴을 하던 2005년 셋째 형 김종선씨와 함께 디엔에이 검사에 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전자 구조가 일치하는 유해는 나오지 않았다. 유해발굴 때 국방부가 발표한 것처럼 20구의 개체(교육 중 사망한 7명과 사형 집행된 4명은 제외)가 나왔지만 유족과 디엔에이가 일치한 개체는 4구였고, 나머지 4구는 ‘가능성이 높음’으로만 나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12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이들은 공작원의 유해가 맞을까? 김종철의 죽음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안김정애 상임대표는 “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는 20명 전원 사망으로 쓰기로 결정했고, 이견은 보고서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했다.
형 김종철은 호적에 ‘실종’으로 돼 있다. 김종억씨가 공군본부의 사망신고 권유를 끝까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형이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그런데 왜 디엔에이 감식을 했는데 유해가 안 나오냐”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소설 ‘실미도’의 백동호 작가는 한겨레에 “김종철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본다. 군 당국에서 살려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문제는,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느냐다.
김종억씨는 몇 년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느닷없이 ”형님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그냥 이상한 전화려니 치부했다. 그러면서도 한켠에 찜찜함이 남았다. ‘형님이 혹시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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