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지 않던 옛 부산역사가 문화 플랫폼으로
〈6〉 부산 동구 ‘동구문화플랫폼’
열차도 사람도 떠난 옛 부산진역… 2022년 전시문화 공간으로 재탄생
주말 방문객 1000명 몰리며 ‘북적’… 작년 문체부 주관 ‘로컬 100’ 선정
“콘텐츠 활성화할 국비 지원 기대”
“뜻깊은 공간에서 실컷 웃고 위로도 얻었습니다.”
2일 오전 부산 동구 좌천동 동구문화플랫폼 입구. 표애리 씨(41)는 “초등학생 자녀와 시간 가는지 모를 정도로 재밌게 전시회를 즐겼다”며 이 같은 소감을 전했다. 전시관에 입장하자 “킥킥”, “크크” 터질 듯한 웃음을 겨우 참는 소리가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관람객들은 전시를 위해서 설치된 가벽에 부착되거나 앞에 놓인 작품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면서 즐거워했다.
전시회를 연 키크니 작가는 ‘무엇이든 사연을 그려 드린다’는 코너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운영하면서 많은 팬을 확보했다. “소방관입니다. 멋지게 불 끄는 모습을 그려 주세요”라는 요청에 작가는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을 그려 올리는 대신 침대에 누워 벽면 전등의 스위치를 발가락으로 눌러 끄는 중년의 모습을 게재해 많은 이들을 웃게 했다.
● 17년 방치된 역사, 38억 원 들여 문화 공간 조성
이날 키크니 작가의 SNS에 올라온 평면 형태의 그림은 인형과 가구 등을 활용해 꾸민 설치 작품으로 전시됐다. 작품을 보다 감동한 듯 눈물을 훔치는 관람객도 있었다. 한 시민은 ‘백내장을 앓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났는데, 눈이 안 보여 무지개다리를 잘 건널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사연을 보냈고, 키크니 작가는 주인을 달래는 반려견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그림 영상으로 내보냈다.
부산 동구 관계자는 “116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SNS가 주요 작품 무대였던 작가의 오프라인 전시회 개최 소식에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동구에 따르면 올 6월 1일 시작한 키크니 작가의 개인전 ‘일러바치기 인(In) 부산’을 관람하기 위해 평일에는 일평균 300명, 주말에는 1000여 명의 관람객이 동구문화플랫폼을 찾고 있다.
상당수 관람객은 이곳이 얼마 전까지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역사(驛舍)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랐다. 동구문화플랫폼은 고속철도(KTX) 개통 전까지 부산시민이 경부선과 동해남부선을 이용하기 위해 거치던 부산진역 건물이었다.
이 역사는 1920년대 건립된 뒤 무궁화호 등을 이용하던 이들로 붐볐으나 KTX가 개통되고 옛 열차가 더는 서지 않으면서 2005년 문을 닫았다. 이후 17년 동안이나 방치됐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 전시를 위해 일회성으로 활용됐지만 상시 활용 방안을 찾지 못했다. 한때 인근 국가철도공단 부지와 함께 18층 규모의 오피스텔 건립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난개발을 우려한 동구가 건축심의를 반려해 계획이 무산됐다.
역사가 전시문화 공간으로 꾸며져 새롭게 문을 연 시기는 2022년 4월. 동구는 많은 이들로 북적댔던 공간을 시민에게 되돌려 주고자 38억 원을 들여 역사를 개·보수했다. 1년 내내 시민이 예술가와 어울려 소통하는 장으로 이곳을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 “예술 마니아 아닌 온 가족 즐기는 공간으로”
동구문화플랫폼은 지난해 ‘로컬 100’에 선정됐다. 로컬 100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역 내 매력적인 명소, 콘텐츠 등 100가지를 선정해 홍보하는 사업이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지난달 19일 이곳을 찾아 키크니 작가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관람객의 만족도는 높다. 전북 전주에서 휴가를 위해 부산에 왔다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연히 방문했다는 김도원 씨(35)는 “폐역사를 전시관으로 활용한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지 않냐”며 “의미 있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를 볼 수 있어 뜻깊었다”고 했다.
동구는 앞으로 야외광장 공연은 자제하기로 했다. 관람객이 미술 작품 관람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전시기획을 총괄하는 이혜미 동구 주무관은 “키크니 전시의 흥행으로 관람객이 어떤 전시를 보길 원하는지 파악됐다”며 “유명 웹툰 작가 등이 참여하는 전시를 열어 예술 마니아층보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작가와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열 것”이라고 말했다. 동구는 ‘옛 부산진역사’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를 내년에 개최할 예정이다. 6·25전쟁 이후 많은 인파로 붐비던 옛 부산진역사와 인근 수정시장 등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 자료 등을 수집하고 있다.
동구문화플랫폼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한 국비 지원 요청도 검토하고 있다. 김진홍 동구청장은 “역사 공간 임차료(3억3000만 원)와 인건비를 포함해 연간 운영비로만 10억 원의 구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며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몰리는 만큼 더욱 다양한 전시 공연 콘텐츠를 운영할 수 있도록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산=김화영 기자 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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