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너를 믿어봐” 진부하다고요? 모두에게 필요한 말!
한국 일정 사흘째인 지난 16일, 브로드웨이 뮤지컬 ‘킹키부츠’의 안무·연출가 제리 미첼(65)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뮤지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작사가, ‘헤어스프레이’의 캐스팅 디렉터와 각각 컨퍼런스콜을 했다. 운동과 명상을 마친 뒤 서울 종로구 연습실로 나온 시간은 오전 10시. 1시간 여 뒤면 내달 7일 한국에서 6번째 시즌을 개막하는 ‘킹키부츠’의 막바지 연습으로 뜨겁게 달아오를 공간이다.
단정한 머리와 수염, 흰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그는 다음날인 17일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버밍엄으로 이동, 11월 개막하는 뮤지컬 ‘비커밍 낸시’의 연습을 시작한다. 올 연말 영국 플리머스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내년 3~4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붑! 베티 붑 뮤지컬’까지, 개막 예정 공연만 4건에 투어·개발 중인 공연 3건이 더 있다. 몸이 서너개라도 모자랄 텐데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가끔 미친 거 아닌가 싶어요. 스무살 때 무용수로 뉴욕에 왔는데, 그 45년간 단 한 번도 뮤지컬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놀랍죠?”
◇토니상만 3개… 지금 가장 바쁜 안무·연출가
미첼은 ‘라카지’(2005)와 ‘킹키부츠’(2013)로 미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안무상을 2개 받았고, 작년엔 에이즈 퇴치를 위한 기금 모금 공로로 받은 공로상까지 토니상 트로피만 3개. 지금 세계에서 가장 바쁜 안무가 겸 연출가다. 그런 그에게도 ‘킹키부츠’는 특별한 작품이다. 2013년 초연 때 작품상과 작곡상(신디 로퍼)까지 토니상 6관왕이 됐고, 브로드웨이 공연으로만 3억1899만달러(약 4261억원)를 벌어, 캣츠, 미녀와 야수, 미스 사이공 다음 역대 14위 흥행 뮤지컬이 됐다. 내년에도 영국·아일랜드 투어와 일본신국립극장 공연이 예정돼 있다.
◇”누구에게나 결점·상처… 관객은 ‘자신’의 모습 보죠”
아버지의 쇠락해가는 구두 공장을 엉겁결에 물려받은 청년이 여장 남성 공연자 드랙 퀸 친구의 도움으로 그들을 위한 롱부츠를 만들기까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원작. 어찌 보면 나라와 문화에 따라 이질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폭넓게 세계 관객의 사랑을 받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미첼은 “뉴욕에서 통한 이야기가 런던에서 안 통하거나 그 반대일 때도 있는데, 킹키부츠는 뉴욕과 런던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모든 다른 나라 관객들이 한마음으로 사랑해줬다”고 했다.
“이 공연의 무대는 구두 공장, 한 마을과 같아요. 관객은 인물들 속에서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죠. 가족의 기대에 버거워하는 구두 공장 사장 ‘찰리’, 늘 사랑에 실패하는 실수투성이 직원 ‘로렌’, 자신안의 예술가 기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과 싸워온 ‘롤라’…. 심지어 마초 남자 직원 ‘돈’에게서도 누군가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자신을 볼 테니까요.” 그 ‘마초남’까지도 이 뮤지컬의 마지막 패션쇼 장면에선 모두 함께 화려한 롱 부츠를 신고 런웨이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한다.
“당신이 안전지대를 벗어나 한 발 더 내디딜 용기가 필요할 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런 힘을 주는 뮤지컬입니다.”
◇”기대가 버거운 ‘찰리’, 이해 못 받는 ‘롤라’, 내 안에도”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것은 미첼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제게 5살부터 17살까지 일을 주셨어요. 지금도 파스타부터 스시까지 다 되는 프로급 요리 실력이죠. 하지만 저의 3형제는 모두 가족 사업을 물려받지 않고, 소방관으로 운동 코치로, 브로드웨이 무용수로 각자의 길을 갔어요. ‘킹키부츠’에서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이어가야 할 지 고민하는 찰리와 같은 고민을 했던 거죠.” 그는 “남성 동성애자이며 동시에 끼를 주체 못하는 예술가라는 점은 이 뮤지컬의 또 다른 주인공 ‘롤라’와 같다”고도 했다.
‘킹키부츠’는 나이든 관객과 관광객만 있던 브로드웨이 극장에 젊은 관객들을 새로 유입시킨 작품이란 평가도 받는다. 그는 “진부한 것 같지만 젊은이에게 진실로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설교하지 않으며 진심을 전달한 게 통한 것 같다”며 마지막에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 ‘Just Be(그 모습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하나, 솔직하게[Pursue the truth]! 둘, 뭐든 도전해봐[Learn something new]! 셋,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받아줘[Accept yourself and you’ll accept others too!]! 넷, 사랑해[Let love shine]! 다섯, 자신을 믿어봐[Let pride be your guide]! 여섯, 맘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Change the world when you change your mind!]! 삶을 단단하고 행복하게 해 줄,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야기죠.”
◇여섯달 만에 만들어낸 명장면 ‘컨베이어 벨트 댄스’
미첼은 “이 뮤지컬엔 완전히 다른 삶의 배경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common ground)을 주는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다”고도 했다. “이야기엔 사람의 마음을 바꾸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이 뮤지컬이 서로 다름을 포용하는 일에 대해 계속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사람들 마음을 변화시켜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할 테고요. 성장하지 않으면 고루해지고 정체되죠. 젊은 관객은 이 공연의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보고, 그걸 기억하고 성장하며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 갈 테니까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과 안무를 묻자, 미첼은 컨베이어 벨트 댄스와 롤라의 복싱 경기 장면을 꼽았다. 모든 배우들이 무대 위의 구두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고 뛰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은 6개월을 공들여 빚어낸 이 뮤지컬에서 가장 신나고 즐거운 장면 중 하나. 계속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로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며 노래와 춤을 완성해간다. 배우들 앙상블의 힘이 놀랍다. ‘롤라’가 킹키부츠를 만드는 일에 반대하는 구두 공장 직원 ‘돈’을 설득하기 위해 복싱 경기로 맞붙을 땐 다리에 고무줄을 묶은 앙상블 배우 ‘앤젤’ 중 한 명이 누운 채 다리를 쭉 뻗어 ‘뚝딱’ 복싱 링을 무대 위에 구현한다. 라이브 액션 무대 만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관객의 상상력이 만나 빚어내는 짜릿한 명장면이다.
◇”남보다 1시간 먼저 시작하세요, 인생이 바뀔 걸요”
그는 “세계 각국에서 그 나라 최고의 재능을 발견하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건 연출가로서 엄청난 특권이며 지금도 늘 신기한 일”이라고도 했다. “한국 첫 공연 캐스팅 때 강홍석 배우의 ‘롤라’ 연기 영상을 보고 ‘이 친구가 롤라’라고 ‘픽’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홍석은 뉴욕에 있었다면 브로드웨이 스타가 됐을 배우예요.” ‘킹키부츠’의 ‘롤라’ 역할로 크게 주목 받은 강홍석은 지금 뮤지컬 ‘하데스타운’에 ‘헤르메스’로 출연 중이며, 이번 ‘킹키부츠’ 공연에 다시 ‘롤라’로 참여하고, 연말 개막하는 디즈니 메가히트 뮤지컬 ‘알라딘’ 한국 초연에 ‘지니’ 역할로 무대에 선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최선의 결과를 내는 비결이 있을까. 그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라고 ‘정답’을 내놨다. “배우 휴 잭맨과 함께 작품을 할 때, 뉴욕 42번가 스튜디오에서 연습이 매일 아침 10시에 시작했어요. 연습실은 9시에 문을 열었고요. 아침 9시 첫 엘리베이터 안에는 늘 나와 휴 잭맨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보다 1시간 일찍 시작하면 그 투자가 당신과 일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꿔줄 겁니다.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시작하세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 제가 늘 배우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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