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그가 처음 배운 소화기 사용법
16일 오전 세종 한 연수원 건물 1층에서 자욱한 연기가 퍼져 나갔다. 이날은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우리나라에 입국한 미얀마인 근로자 140명이 화재 대피 훈련을 받는 날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연기를 뚫고 미얀마 근로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대피 연습을 했다. 소방대원이 알려준 대로 수건으로 입을 막고 허리는 숙인 채 한손으로는 벽을 짚으며 도망쳤다. 심폐소생술(CPR)과 소화기 사용법 교육도 이뤄졌다.
고용부 허가를 받아 우리나라에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들은 일터로 흩어지기 전 2박 3일간 한국 적응 교육을 받는다. 한국의 직장 생활부터 보험, 세금 제도, 그리고 근로자로서의 권리에 대해 배운다. 산업 안전 교육은 원래도 있었지만, 이렇게 화재 상황을 가정한 실습까지 하는 것은 이번 달이 처음이다. 지난 6월 외국인 근로자 18명을 포함해 23명의 생명을 앗아간 경기 화성 리튬 전지 공장 화재 이후 고용부가 마련한 재발 방지책이다.
교육을 마친 후 미얀마에서 온 아웅모뚜(35)씨에게 “본국에서 이런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심폐소생술은 한국 드라마에서 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며 “소화기 사용법은 처음 배웠다”고 말했다. 아웅모뚜씨는 미얀마에 아내와 일곱 살 아들, 두 살 딸을 두고 왔다. 현재 미얀마 내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 때문에 그는 태국 등 다른 나라의 일자리를 전전하며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여기에 코로나 시기가 겹쳐 한국에 오기까지 5년을 기다렸다고 한다. 앞으로 그는 4년 10개월 동안 화성의 한 제조업 공장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본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는 “갑자기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울 기회를 준 한국 정부에 감사하다”고 했다.
이들에게 ‘한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제조업, 조선업 등 산업 현장은 이미 아웅모뚜씨 같은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날 미얀마 근로자 1명을 데리러 온 한 제조업 공장 사장은 “한국인은 급여를 야근 없이 월 350만원까지 높여도 일하겠단 사람이 없다”며 “중소업체는 그 비용을 다 감당하다간 망한다”고 했다.
올해 고용부는 ‘E-9(비전문취업)’ 비자로 취업 가능한 업종을 음식점, 숙박업 등 서비스업까지 확대했다. 한국인 구인이 어려운 설거지, 재료 손질 등 단순 업무에 한해 외국인 근로자를 쓸 수 있게 됐다. 연말부터는 식당, 호텔 등 우리 생활 곳곳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볼 수 있을 것이란 의미다. 지금 아웅모뚜씨에게 소화기 쓰는 법을 알려주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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