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초상화로 얼굴 보존된 왕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뿐

유석재 기자 2024. 8. 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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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임금 철종 어진(왼쪽 부분 불에 탔음). /문화재청

조선시대의 국왕 중 후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군주라면 4대 세종과 22대 정조일 것입니다. 이들의 얼굴, 초상화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임금들의 진짜 얼굴이 아닙니다. 모두 후대에 상상을 가미해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이 있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어진(御眞), 즉 임금의 초상화(초본 포함) 중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의 초상화뿐입니다. 이 여섯 임금이 아닌 다른 왕의 초상화는 대부분 1950년대 이후 별 근거 없이 새로 그린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두 임금인 고종과 순종의 어진이 물론 있지만, 이들은 어진 말고도 사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의 얼굴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초상화나 초상화의 초본을 통해서 그 얼굴을 알 수 있는 조선 시대의 임금은 태조(1대), 세조(7대), 영조(21대), 철종(25대) 등 네 명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된 걸까요.

6·25 전쟁이 끝난 지 1년 남짓 지난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부산의 용두산 근처 판자집에 살던22세 식모가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 둔 채로 잠자고 있었습니다. 촛불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불길이 일어났고, 북서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용두산 동남쪽 일대 피란민촌 298동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사망 1명, 이재민은 1422명이 발생했으며 피해 금액은 397만4000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길이 인근에 있던 관재청 창고로까지 옮겨 붙은 것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창고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해 불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창고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자 서울에 있는 궁중 유물 4000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과 재상을 그린 초상화, 고서적, 은제기 같은 보물급 유물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태조와 세조 어진은 보존됐습니다. 1921년 이왕직(李王職)은 창덕궁에 신(新)선원전을 만들고 여러 궁궐에 흩어져 있던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아 봉안했습니.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 어진들은 다른 옛 황실 유물 4000여 점과 함께 임시 수도 부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용두산 근처에 있던 관재청 창고였죠. 1953년 휴전 이후에도 계속 그곳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언제 다시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쉽게 다시 옮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왕실 유물 4000점 중에서 3500점이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소실된 유물 중에는 숙종, 정조, 순조, 헌종의 어진도 있었습니다. 일제와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던 어진들이 한순간에 어처구니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작업한 명품 중 명품이며 임금의 실제 얼굴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이렇게 잿더미가 됐던 것이죠.

정조 어진 원본은 조선 시대 대표적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놀라운 것은 화재 전 사진 촬영해 놓은 어진조차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왕들의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 우리는 영영 알 길이 없게 돼 버린 셈입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네 임금의 초상화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전북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국보 조선 태조 어진. /문화재청

먼저 국보로 지정된 조선 태조의 초상화입니다. 지금 전주의 어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제작했다는 태조 어진 26점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어진입니다. 조선 말인 1872년 제작한 것이지만, 충실하게 옛 그림을 베껴냈기 때문에 원래 초상화를 그렸던 조선 초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림 속 태조 이성계는 임금의 복장인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쓴 채 위엄 있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인(武人) 출신다운 기개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적절한 음영을 넣어 얼굴이 살아 있는 듯한데, 옆으로 늘어진 귓불은 넉넉한 풍모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눈썹 위에 난 작은 혹까지도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조선 임금의 어진 중에서 전신상(全身像)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초상화가 유일하기 때문에 더욱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어진 역시 최근에 훼손된 적이 있습니다. 2005년 무려 40㎝가 찢어져 얼굴의 귀와 입 부분이 큰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관리 소홀로 인한 참사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조선 21대 임금 영조 어진. /문화재청

초상화가 살아남았다는 데 있어서 가장 운이 좋은 임금은 영조였습니다. 영조의 어진은 임금일 때 익선관을 쓴 상반신 초상화와 임금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 초상화까지 다행히 2점이 화마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익선관을 쓴 어진은 보물로 지정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데, 51세 영조 임금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조선 시대 초상화의 정신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예전에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이순재씨와 상당히 닮은 얼굴입니다.

철종 어진은 용두산 화재의 비극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왼쪽 부분과 얼굴의 입 주변이 불타 버렸지만,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는 남았습니다. 군복을 입은 조선 임금의 유일한 초상화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군복의 화려한 채색에서 당시 화가들의 필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2018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된 조선 7대 임금 세조 어진 초본. /뉴스1

그런데 2016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세조의 어진은 불타 버렸지만, 1935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왕실의 주문을 받아 옛 어진을 베껴 그릴 때 만들었던 어진의 초본이 경매에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조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숱한 혈육과 신하들을 죽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하고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 시절 젊었을 때 초상화가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분명히 초상화 속 인물은 곤룡포를 입고 있었습니다. 얼굴에 수염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세조 어진을 봤던 김은호 화백의 생전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이 작품은 국립고궁박물관이 낙찰을 받았고, 아쉬운 대로 어진 복원 작업도 가능해졌습니다. ‘인상 좋은 살인마’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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