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한의 메디컬리포트]글로벌 제약사의 심각해진 ‘코리아 패싱’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2024. 8. 2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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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6월부터는 부작용이 적은 기면증 약 ‘와킥스’를 국내에서 처방받을 수 없어요.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약인데….”

최근 서울에서 수면클리닉을 운영하는 의사를 만났는데 그는 2년 전 국내에 출시된 기면증 약의 공급이 내년 6월부터 중단된다고 했다. 국내 가격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제약사가 글로벌 의약품 가격을 맞추기 위해 아예 공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기면증은 비정상적으로 잠이 많아지는 질환으로 충분히 잤음에도 낮에 2, 3개월간 계속 졸리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기존에도 약은 있었지만 신경이 예민하거나 조울증인 환자에게는 증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신약은 이 같은 부작용이 없다.

문제는 부작용을 개선한 약임에도 신약 가격이 기존 기면증 약과 비슷하게 책정됐다는 것이다. 이 약이 가장 저렴하게 팔리는 프랑스에서도 1정에 1만 원 정도인데, 국내에선 2500원가량으로 책정됐다. 중국은 한국 의약품 가격을 참고해 국내 유통 가격을 정하는데, 시장 규모가 큰 중국에서도 한국처럼 낮은 가격에 팔릴 수 있다는 생각에 제약사가 한국 시장을 포기한 것이다.

최근 낮은 국내 의약품 가격을 이유로 글로벌 제약사들이 신약 출시를 꺼리거나 이미 출시한 의약품마저 공급을 중단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당뇨병 약 ‘포시가’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 약은 당뇨병뿐 아니라 심부전이나 만성신장병 치료에도 쓰이면서 지난해 국내에서만 500억 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제약사는 포시가의 국내 유통 가격이 미국의 3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며 한국 시장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역시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을 유지해 얻는 이득이 한국 시장 포기로 발생하는 손실보다 크다는 판단에서다.

‘코리아 패싱’이 발생하는 의약품 중에는 폐동맥고혈압질환 치료제, 조현병 치료제 등도 있다. 효과가 좋다고 알려진 폐동맥고혈압 치료제 에포프로스테놀은 1995년 외국에 출시됐지만 29년째 가격 문제로 국내 시장에 못 들어오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일부 제약사들은 신약을 개발했을 때 아예 한국 시장 출시를 포기하기도 한다. 선진국 3곳 이상에서 출시 허가를 받았고, 해당 국가에서 건강보험 적용 대상임에도 국내에선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닌 혁신 치료제는 알려진 것만 14개나 된다. 이 약들이 치료하는 질병은 다발골수종, 희귀폐암, 폐섬유증, 조기유방암, 전신농포건선, 두경부암, 식도암, 직결장암, 자궁내막암, 자궁경부암, 삼중음성유방암, 유전성혈관부종, 단장증후군 등으로 생명과 직결되거나 삶의 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다.

심지어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도 가격 문제로 국내에 선보이지 않는 황당한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의 경우 탁월한 효능을 인정받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출시됐지만 국내에선 낮은 가격 책정을 이유로 출시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고려해 의약품 가격을 낮게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과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익을 내려 하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 시장만을 위해 ‘특별 할인가’를 설정해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급여적정성 재평가, 임상재평가, 사용량-약가연동, 해외 약가 비교 재평가 등을 통해 의약품 가격을 낮추려고 노력하지만 글로벌 제약시장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정부도 이 같은 지적을 감안해 올 2월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을 통해 ‘혁신성 인정 신약’은 비용 대비 효과가 일정 수준만 넘어도 경제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또 고가 중증질환 치료제의 경우 허가, 급여평가, 약가협상 동시 진행 제도를 도입하고 희귀질환 약제 사전심의(승인)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대상이 되는 의약품은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제약업계에선 국내 의약품 가격을 혁신적으로 바꾸지 않을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도 못 미치는 한국의 혁신신약 등재 속도가 빨라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해법은 정부가 생명과 직결된 약에 대해 ‘패스트트랙’을 만들고 신약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동시에 외국 제약사도 사회적 지원 등 긴밀한 협조를 통해 국내 환자가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내년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한국에서 신약이 가지는 사회·경제적 가치를 생각해서라도 이 같은 노력이 꼭 필요하다. 재정을 중심에 둔 현재와 같은 의약품 가격 관리로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코리아 패싱’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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