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을 뒷받침한 극단, 그 뒤틀린 뿌리는[책과 삶]
벤저민 타이텔바움 지음 |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 372쪽 | 1만9800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지도자가 조언을 구하는 인물이 위험한 사상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 세계는 안전할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탄두를 보유한 국가 지도자의 정신적 스승이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또 어떨까.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 설정이 아니다. 이는 이미 세계가 한 차례 경험했고, 일부 지역에선 지금도 진행 중인 현실이다. 한 명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책사’로 불렸던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 스티브 배넌(71), 다른 한 명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두뇌’로 불리는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62)을 가리킨다.
<영원의 전쟁>은 미국 인류학자이자 극우운동 연구자인 벤저민 타이텔바움이 두 사람과 한 대면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이 추종해온 사상 체계를 해부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배넌과 두긴의 사상적 공통분모는 ‘전통주의(Traditionalism)’라 불리는 비주류 철학사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소중한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할 때의 소박한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의 책사’ 배넌과 ‘푸틴의 두뇌’ 두긴, 전통주의 토대로 백인·남성 위주 극우 사상 형성
일부 집단의 ‘파괴적 세계관’ 미·러 권력층에 주입…주류 정치 세계에서 여전히 영향력 과시
이들이 추종하는 전통주의는 기존 철학사상의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둠의 사상으로, 요설에 가까운 급진성과 무모함 탓에 “지난 100년간 지하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온 철학적·영적 학파다.” 전통주의는 심지어 극우 부상을 경계하는 외신 기사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낯선 용어다.
전통주의자들은 역사가 진보하지 않고 퇴행한다고 본다. 이들에 따르면 역사는 네 가지 시대(금→은→동→금)를 영원히 순환하는데, 지금은 영적인 가치가 쇠퇴하고 물질적인 것이 지배하는 ‘동’의 시간이다. ‘금’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동’의 시간에 만들어진 타락한 것들이 파괴돼야 한다고 믿는다. 전통주의자들은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타락한 현대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들은 흰 피부의 아리안 인종이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단계에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친화적이고, 반이민·반페미니즘·반세속주의 경향을 드러낸다.
프랑스 신비주의자 르네 그농(1886~1951)과 이탈리아 철학자 율리우스 에볼라(1898~1974)가 전통주의 사상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들이라면, 배넌과 두긴은 소수의 극단적 극우주의자 서클에서나 은밀히 읽히던 “파괴적 세계관”을 극우 성향 권력층의 두뇌에 주입한 인물들이다.
배넌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 계층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버지니아공대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선불교와 힌두교 등 영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 구축함 승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기항지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관련 서적을 구했다. 1990년 골드만삭스를 그만둔 뒤 투자은행을 설립해 영화 제작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영적인 목마름은 해결하지 못했다. 이를 해결해준 것은 그농의 저서들과 그농에 정통한 샌프란시스코대 제이컵 니들먼 교수와의 교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배넌은 2012년 극우 성향 인터넷언론 브레이트바트뉴스 최고경영자(CEO)가 된 것을 계기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해 트럼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2016년 대선에서 선거전을 지휘해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그는 ‘백악관 수석 전략가 겸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국내외 정책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이민자 추방, 공교육·환경보호 예산 삭감, 기후협정 탈퇴 위협 등은 우리가 이미 지켜본 그대로다.
“배넌은 종종 거대한 ‘행정국가’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자신이 속한 제도권에 적대적인 인물을 권력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는 기꺼이 기관의 임무와 기능을 망가뜨릴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배넌은 트럼프를 ‘시간 속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는 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사람이라는 뜻의 전통주의 철학 용어다.
두긴은 1980년대 ‘유진스키 서클’이라는 이름의 지하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했다. 회원들은 “파시즘, 나치즘, 내셔널리즘, 오컬트주의, 신비주의” 등 주류 지성계가 외면하는 주제들을 탐구하고 연금술, 마약, 강령술에도 손을 댔다. 반소비에트 성향이었던 이들은 나치 군복을 입고 “총통 만세!”를 외치며 나치 경례를 하기도 했다. 서클 해체 후 두긴은 국립도서관에서 그농과 에볼라의 저서를 탐독하며 전통주의 사상을 공부했다.
두긴은 1997년 집필한 <지정학의 기초>가 성공한 것을 계기로 보리스 옐친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책에서 그는 조지아 침공, 우크라이나 병합,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미국의 분열과 고립주의 성향 촉진 등을 통해 러시아가 서구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러시아 육군사관학교 필독서로 채택됐다.
푸틴 정권에서도 크렘린과 친분을 유지한 두긴은 정부 내 공식적인 직위가 없는데도 러시아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푸틴 대통령이 자주 사용하는 ‘다극성 세계 질서’ ‘유라시아’ ‘노보로시야’ 등의 표현은 두긴이 언론에서 퍼뜨리고 다닌 것들이다. 타락한 서구 문명이 순결한 러시아를 위협한다고 보는 푸틴 대통령의 세계관 배후에는 두긴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배넌과 두긴은 2018년 11월 로마에서 비밀 회동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러시아의 2016년 대선 개입 의혹을 둘러싸고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배넌과 두긴은 중국에 대해서는 입장이 확연하게 갈렸다. 그럼에도 배넌이 두긴을 만난 것은 전통주의자로서의 동류의식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배넌은 2017년 8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위 및 딸과의 힘싸움에서 밀려 백악관을 떠났다. 두긴은 2022년 폭탄 테러로 딸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류 정치 세계에 풀어놓은 급진적 극우 사상의 파괴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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