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이…내가 알던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박현정 기자 2024. 8. 22. 20: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텔레그램 성범죄 피해자 법정 진술문
2021년 7월 처음 피해 신고해 2024년 5월 가해자 잡혀
학교나 지역별로 불법합성 성범죄물을 공유하고 있는 텔레그램 방의 모습들. 텔레그램 갈무리

“저희는 ‘변기’도, ‘걸레’도,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어떤 대상도 아닌 각자의 직업과 꿈을 가진 존엄한 인격체입니다. 온라인상이라는 이유로,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는 오만으로 사법 체계에 대한 경시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그토록 거리낌 없이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르며 피해자의 일상과 사회의 신뢰 체계를 파괴하는 이들을 더는 묵인하고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서울대 출신 남성이 대학 동문들 사진 등을 불법합성해 성범죄물을 제작·유포한 사건 피해자 루마(가명)씨가 법원에 하고픈 말이다. 그는 2021년 7월 텔레그램을 통해 익명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이 담긴 성범죄물을 받았다. 이렇게 처음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지 약 3년 만인 올해 5월 같은 대학 출신 가해자 2명이 붙잡혔다. 가해자들은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그가 처음 경찰 신고를 한 2021년 7월부터 2년 가까이 모두 네 군데 경찰서가 수사를 했지만 가해자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범인 추적에 나선 건 “이런 피해의 고통이 다신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일부 대학 단위로 불법합성물 성범죄가 벌어지고 있음이 잇따라 드러나는 가운데 텔레그램 등 온라인에선 지역·학교 ‘지인’인 피해자 이미지를 훔쳐 성범죄물을 만들어 유포하고 이를 다시 피해자에게 알리고 괴롭히는 범죄가 이미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명백한 성범죄다. 피해자 탓이 아님에도 같은 학교나, 직장, 지역 공동체에 속해 있던 이들로부터 끔찍한 피해를 겪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잘 새어 나오지 않는다. 불법합성물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우리 사회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루마씨가 서울중앙지법 재판부에 보낼 피해자 진술문을 22일 미리 받아 독자들에게 전하는 까닭이다.

피해자 루마씨의 법정 진술문

존경하는 재판장님과 판사님들께

먼저 이렇게나마 법정에서 피해자로서 제 목소리를 전할 수 있게 해주심에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진술문을 준비하며 처음 피해를 입었던 날로부터 지금까지 3년 1개월이라는 시간을 돌이켜봤습니다.

익명의 계정으로부터 대뜸 제 얼굴이 합성된 음란물 수십장과 남성들의 자위 영상이 쏟아져 왔을 때, 제 사진과 신상 정보를 유포한 단체 대화방에서 다수의 가해자들이 함께 낄낄대며 저를 희롱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얼마 뒤 그것이 같은 대학 반 구성원들의 소행임을 알게 되었을 때…국외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약자들의 삶과 언어를 조명하고 교육과 제도 개선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로 학업에 매진하던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들에 의해 ‘좆받이’, ‘걸레’, ‘노예’로 불리고 있었고, 그게 다름 아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저와 알고 지냈던 이들의 짓이라는 처참한 진실 앞에, 제가 알고 있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사람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지옥 같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세상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범인을 추적하고 사법 절차를 밟아온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런 피해의 고통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물건 취급되고 피고인들과 같은 자들의 열등감을 보상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변기’도, ‘걸레’도, 그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어떤 대상도 아닌, 각자의 직업과 꿈을 가진 존엄한 인격체입니다. 온라인상이라는 이유로,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는 오만으로, 사법 체계에 대한 경시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그토록 거리낌 없이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르며 피해자의 일상과 사회의 신뢰 체계를 파괴하는 이들을 더이상 묵인하고 방관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본 사건으로 누구보다 오랫동안 고통받아 온 당사자로서 말씀드리건대, 이 사건의 피해 회복은 앞으로 수년이 더 걸릴지도 어쩌면 평생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제 신상 정보와 사진, 허위영상물 등은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되었고, 저는 3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통받고 있으며, 범행에 가담했으나 여전히 잡히지 않은 수많은 가해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피해물을 이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떠안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적어도 이 두 피고인만큼은 범행에 상응하는 형을 받아 복무하고, 사회에 복귀한 뒤에도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책무를 다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보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사회 안에서 믿음을 쌓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장님께서 내려주실 판결은 바로 그러한 회복의 시작에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될 것입니다.

부디 이 사건이 저를 비롯한 수십 명의 피해자들과 그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끼친 막대한 피해를 고려하시어, 선처 없는 가장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