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명나라의 폭거와 일본의 사도광산
울산왜성 공략 실패한 조·명 연합군
명나라에 좌지우지된 조선 군령권
전쟁 끝내려 5만명 추가 파견한 明
조선 수군 군령권도 명으로 넘어가
조선 고위직, 명 병졸에게 모욕 당해
참다못해 상소 올린 영의정 류성룡
국가 간 관계는 '외교'에 따라 달라진다. 외교전에서 우위에 선 국가는 갑甲, 열위로 처진 국가는 을乙일 수밖에 없다. 1597년 정유재란이 터졌을 때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그랬다. 명에 원조를 청한 조선으로선 그들의 폭거에 항변조차 못할 정도로 굴욕을 맛봤다. 최근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강제노역'의 장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정부는 별말이 없다. 우리나라 외교, 괜찮은 걸까.
5000여명을 이끌고 도산성에 도착한 왜군 장수 과도직무는 명군의 오유충, 모국기의 군사를 격파했다. 소조천수추 이하 여러 장수가 과도직무의 뒤를 이어 명군의 진영을 공격했다. 여기에 성안에 있던 가등청정의 군사들이 뛰쳐나와 뒤를 받쳤다.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봉수하가정, 등당고호의 병력들도 언양, 밀양 등지에서 몰려왔다. 이렇게 울산으로 모여든 왜적의 병력 규모는 5만여명에 이르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의 울산왜성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눈보라가 몹시 휘날리던 1597년 정유년 12월의 마지막 날, 이순신은 보화도에서 휘하 장수들과 결산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때 부체찰사 홍이상이 보낸 군관이 이순신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조선에 도착할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통제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은 이미 11월 29일 명나라 유격 마귀의 차관인 왕재로부터 "뱃길로 명나라의 군대가 내려온다"는 통보를 받은 바 있다.
국력이 약한 탓에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그로 인해 군령권조차 명나라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게 그를 더 슬프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정유년 한해 수군통제사에서 파직돼 고초를 겪고 백의종군하던 중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죽음을 무릅쓰고 명량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그 여파로 셋째 아들 면까지 전사했다. 이날 밤 이순신은 "1년이 끝나는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비통한 마음이 더욱 깊다"고 표현했다.
1598년 무술년 1월 1일, 보화도의 통제사 진영에 경상우수사 이순신, 조방장 배흥립, 창의별장 송대립, 송득운, 김붕만 등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과 인근 지방관들이 모여들었다.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놓은 함선들의 진수식(1월 2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당시 군선 건조는 보화도뿐만 아니라 인근의 진도, 평안도 철산, 황해도 장산곶 등 왜군이 장악하지 못한 전국의 병참기지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순신의 전선 보유량 목표는 200척 이상이었다. 하지만 후일 노량해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80여척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전쟁의 여파로 일꾼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자 했다. 전쟁비용 부담 때문이었다. 변방의 여진족도 골칫거리가 되면서 선택과 집중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여진족이 조선의 북방지역까지 침범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왜적과의 전쟁으로 가뜩이나 힘든 처지의 조선 조정을 바짝 긴장시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명나라 형부시랑 여곤呂坤은 자국 조정에 조선 문제를 다룬 상소문을 올렸다. "조선이 우리의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우니 일본이 만약 조선을 빼앗아 차지한다면, 그 백성들을 뽑아 군사로 삼을 것이며 그 땅에서 군량을 돕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북경은 1년도 되지 않아 앉은 채로 곤경을 당할 것이니, 이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지난날에 조선이 청병하나 조정에서는 원조를 허락하고도 기일을 늦추었습니다. 조선은 형세가 더 궁해지고 힘이 꺾이면, (명나라가) 조선으로 들어가도 일본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일찍 큰 계책을 결정하여 동정東征하도록 하소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는 병부상서 형개를 정동총독征東總督으로 삼아 조선의 전쟁을 총괄토록 하는 한편 5만명 규모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했다. 또 태자사보太子師保 진린에겐 광동廣東 절강浙江의 수군을, 마귀에겐 선부宣府 대동大同 육군을, 유정에겐 묘병苗兵을, 동일원董一元에겐 한상漢上의 육군을 제독하게 했다.
수륙 4제독은 자신이 관할하는 병력들을 차출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명나라의 수군까지 가세한 이른바 '사로병진'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로 인해 그동안 유일하게 유지해 왔던 조선 수군의 군령권도 명나라 수군에 넘어갔다.
여기에 맞춰 선조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군사 1만여명을 차출, 명나라 동정군의 총독 형개, 경략 양호, 제독 마귀 등의 통제를 받으면서 한강의 각 여울목을 지키도록 했다. 이에 앞서 양호와 마귀는 정유년 12월말 조명 연합군 5만명을 이끌고 1만명 규모의 왜적이 주둔하고 있는 울산 도산 성을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명나라 군사들이 속속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조선의 고위 인사들이 명나라 병졸에게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영의정 류성룡이 직접 나서 장졸들에게 나라를 위해 고통을 견디고 분을 참으라고 다독거리는 순회 위문을 다닐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조선 조정은 양호의 참장 설호신, 유격 진인 등의 무리가 남대문 밖 동록에 관성묘關聖廟를 세우자 그 비용으로 은자를 내어주기도 했다.
조선 측이 무기력하게 대응할수록 형개·양호·마귀 이하 명나라 장졸의 폭행과 약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조선 조정에 군자금 명목으로 재물을 내놓으라고 졸라댔다. 어쩌다 응하지 못할 경우엔 이런 식으로 호령했다.
"너희가 재물을 숨기고 군자금을 아니 대니 황제께 아뢰어 죄를 내리게 하겠다. 너희가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테니 그리 알라!" 명나라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들이닥쳐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저항하면 폭력을 쓰는 게 일상이었다. 참다못한 영의정 류성룡이 상소까지 올렸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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