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하드보일드 껍데기를 쓴 멜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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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곤경에 처해있다.
범죄조직 뒤를 봐주던 그의 이름이 용의선상에 오르자, 전모가 밝혀질 것을 염려한 일당은 모든 혐의를 홀로 뒤집어쓸 것을 제안한다.
이걸 얻기 위해선 감옥에 있는 동안 몰랐던 임석용(이정재)의 행적과 그의 석연찮은 자살에 얽힌 진실을 풀어야 한다.
수영은 "내 마음에서 썰물처럼 다 빠져나왔다"는 말로 석용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다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은연중 직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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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곤경에 처해있다. 범죄조직 뒤를 봐주던 그의 이름이 용의선상에 오르자, 전모가 밝혀질 것을 염려한 일당은 모든 혐의를 홀로 뒤집어쓸 것을 제안한다. 대가는 7억 원과 아파트 한 채. 2년 형기를 마친 형사는 바깥 공기를 쐬지만 마중 나오는 사람도, 약속된 보상도 없고 남은 건 쥔 것 없는 빈손과 비리를 저지른 전직 경찰이라는 낙인뿐이다. 꼬리 자르기를 당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받아야 할 몫을 되찾고자 나선다. 구식 리볼버 권총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찔러 넣은 채.
‘리볼버’의 줄거리는 평범하다. 큰 틀에서 보면 ‘포인트 블랭크’(1967) ‘찰리 배릭’(1973) ‘차이나타운’(1974) 같은 하드보일드 범죄극을 신흥 아파트 개발지역이라는 한국 배경에 여성 주인공 판으로 바꾼 것 아닌가 싶어진다. 오승욱 감독의 놀라운 점은 이처럼 낡은 플롯의 각본을 쥐고 예상과 전혀 다른 결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이건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쓴 양, 필름느와르의 탈을 뒤집어쓴 멜로드라마이다. 통속적인 장르의 흥분과 쾌감을 걷어낸 자리에는, 파도가 휩쓸고 간 해변에 뻐끔거리는 소금거품처럼 씁쓸하고도 애잔한 인물의 감정과 무드만이 오롯이 남는다.
하수영(전도연)의 일차 동기는 받기로 한 돈과 아파트다. 이걸 얻기 위해선 감옥에 있는 동안 몰랐던 임석용(이정재)의 행적과 그의 석연찮은 자살에 얽힌 진실을 풀어야 한다. 돈과 아파트는 극을 끌고 가기 위한 핑계이자 구실에 지나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더는 중요치 않아 진다. 수영은 “내 마음에서 썰물처럼 다 빠져나왔다”는 말로 석용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다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은연중 직감하게 된다. ‘한밤의 암살자’(1967)의 알랭 들롱이 그랬던 바처럼, 전도연은 감정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과묵한 인물로 하수영을 건조하게 연기하지만, 그러기에 관객은 도리어 무표정의 이면에서 예민하고 복잡한 감정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음을 읽어내게 된다.
진실을 찾는 전직 형사 수영의 여정은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자기 존재를 되찾는 과정이면서, 한 편으로 이미 강을 건너버려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된 그 사람의 진심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의 추적이 된다. 죄를 저지른 비루한 인간, 속물에게도 그 안에 조금은 고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진흙탕에서도 연꽃은 피듯, 가장 속(俗)된 밑바닥에서 일말의 성(聖)스러움은 있으며, 비록 미약하지만 그러하기에 더없이 감동적일 수 있다. ‘리볼버’는 ‘무뢰한’(2015)에 이어 다시, 상이한 것의 충돌에서 사람다움의 온기를 찾는 오승욱식 휴머니즘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옛 상사 민기현(정재영)이 선뜻 권총을 내주는 건 도움이 아닌,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짓고 추락해버리라는 독이 든 사탕에 가까운 것이다. 함정임을 영민하게 알아챈 수영은 궁지에 몰리기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누구도 죽이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한다. 선을 넘지 않고 가능한 폭력 묘사를 절제하려는 ‘리볼버’의 영화적 품위에서 나는 복수의 당위성을 업고 유혈낭자하고 자극적인 이미지 전시에 거리낌 없는, 오늘날 한국영화의 윤리적 퇴락에 대한 묵직한 경고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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