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파세대! 부모 말 듣지 마라 [노정혜 칼럼]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얼마 전 모교인 고등학교에서 1·2학년 학생들을 위해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공계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도움이 될 조언과 전망을 해달라는 부탁에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2007년 이후 스마트폰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세상으로 태어난 이 아이들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급변하는 미래에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게 좋을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디지털 가상세계에서의 활동이 현실 세계에서보다 훨씬 활발한 중학생 손녀를 이해해보려고 전전긍긍하는 베이비부머 할머니로서 꼰대나 라떼가 아닌 인생 얘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심이 되었다.
세대의 구분을 칼로 자르듯 할 수는 없으나, 통계의 편리성을 위해 많이 쓰이는 연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64년까지의 출생자를 베이비부머, 1965~1980년 사이의 출생자를 엑스(X)세대, 1981~1996년을 엠(M)세대, 1997~2012년을 제트(Z)세대, 그 이후를 알파세대로 나눈다고 한다. 2000년대를 연다는 의미의 밀레니얼세대, 즉 엠세대는 제트세대와 합쳐 엠제트(MZ)라는 약칭으로 젊은 세대를 대표해왔지만, 어느덧 우리 사회의 허리인 기성세대가 되었다. 이제는 20대 중후반까지 진입한 제트세대가 경제 활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제트세대와 알파세대를 아우르는 잘파라는 표현이 엠제트를 대체하여 젊은 세대를 지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빨리 세상은 변하고 있다.
피시(PC)의 보급과 함께 성장한 엠세대와 다르게 제트세대와 알파세대는 손끝에 연결된 모바일 기기와 함께 태어나고 성장했다. 텔레비전 편성표대로 뉴스와 드라마를 보는 베이비부머나 엑스세대와 달리, 엠세대는 아무 때나 인터넷이 연결된 피시로 모여들어 좋아하는 뉴스와 게임들을 소비하면서, 집단의식이 강화된 문화를 만들었다. 여기서 더 진화하여 잘파는 몸의 일부가 된 모바일 플랫폼에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전세계를 무대로 동호인들과 관심거리를 연결해간다. 게임이나 영상 등 디지털콘텐츠들을 적극적으로 소비할 뿐 아니라 스스로 제작해 내는 데도 자유롭다.
제트세대의 부모들은 대부분 엑스세대인데, 이들은 우리나라가 가파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태어나고 자라면서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을 보장한다는 단순한 성공 방정식을 체화하며 일반화했다. 따라서 자녀들도 같은 공식을 따라 성공해주기를 바란다. 알파세대의 부모들인 밀레니얼세대는 엑스세대보다 줄어든 직업시장에서 고전하며, 안정과 행복을 강하게 희구하고, 자녀들도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잘파세대의 부모들은 자신의 삶에서 터득하고 추종한 성공 법칙을 디지털 선진국에 태어난 자녀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무리인 줄 알면서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밀어붙이고 싶어 한다.
나는 나보다 50년이나 아래인 고등학교 후배(!) 여학생들에게, 진로를 결정할 때 부모의 말을 듣지 말라고 충고했다. 아니, 부모의 말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조언일 때는 잘 새겨듣되(예를 들어, 정직하게, 열심히, 남을 배려하며, 즐겁게 살아라 등),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까를 결정할 때는 귓등으로 흘려들어도 된다고 조언했다. 왜? 부모들은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대에 대해 잘 모르니까. 게다가 부모들은 자식을 큰 틀에서 객관화해 볼 수 있는 능력이 결정적으로 제한된 존재들이니까.
어느 맘카페에서 시행한 무기명 여론조사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선 최고 인재들이 어디로 가야 하나”란 질문에 75%가 넘는 답변이 “이공계”를 꼽았고 9%만이 의대를 꼽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 아이가 내신이나 모의고사 1등급 초반이라면?”이란 질문에 대해선 80%가 “의대에 보낸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잘파세대의 진로지도를 부모에게만 의존하면 나라의 미래가 어두워진다는 것이 자명하다.
작년에 세계경제포럼이 전문가들에게 10년 뒤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위기를 무엇으로 보는지 물어보았을 때 상위 4개의 응답은 모두 지구 환경과 관련된 것이었다. 극심한 기상이변, 지구 시스템의 결정적인 변화, 생물 다양성의 격감과 생태계 붕괴, 자연 자원의 부족이었고, 이어서 디지털 환경과 관련된 것으로 거짓 정보의 확산, 인공지능 기술의 역기능, 사이버 보안의 결함 등이 지적되었다. 연일 폭염 기록을 경신하는 올해의 여름을 보내며 너무나 이해가 되는 응답이다. 이러한 위기의식과 결을 같이하여, 2023년 같은 기관이 발행한 미래직업보고서는 향후 5년간 과학기술의 적용으로 일자리가 늘어날 분야로 기후변화 대응 기술, 환경공학, 빅데이터 분석, 사이버 안전, 생물공학, 농업 기술, 디지털플랫폼, 건강과 돌봄 기술, 교육과 인력 개발, 증강 가상현실, 에너지 저장 등을 꼽았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앞으로 이러한 분야에서 일해야 한다.
태생이 달라서 이해가 어렵지만 우리의 잘파세대는 자유롭고 진취적이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의 취향에 충실하고 정직하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획일적 주입교육에 주눅 들어 살았던 조부모와 부모 세대에 비해 자신만만하고 거침이 없다. 세계를 무대로 시공간을 확장한 디지털 가상세계는 그들의 놀이터이자 작업장이다. 그동안 쌓아온 조상의 유산 덕분에 그 어떤 세대보다 부자이기도 하다. 올여름 파리올림픽에서 우리의 젊은 선수들이 보여준 기량은 이제 거침없는 제트세대가 전면에 나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한껏 부추겨준다.
그러나 잘파세대의 희망적 기량에 비례하여, 그들에게는 망가진 지구 환경을 감당해야 하는 짐이 무겁고, 인공지능과 가상세계의 급격한 확산이 불러오는 많은 부작용과 정신적 불안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 또한 막중하다. 그들과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현재 직면한 위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기술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일들에 잘파세대가 뛰어들어야 한다. 지구 생태계와 더불어 디지털 가상 생태계도 건강하게 지켜내는 직업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며, 도전을 즐기는 젊은 전문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안정된 고소득 직업에만 집착하는 과거 세대 부모들이 잘파세대의 진취성을 질식시키지 않게 해야 한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한다는 사교육의 덫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그들이 주도적으로 앞길을 선택하도록 독립성을 키워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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