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이세계’ 기자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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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기자가 처음 됐을 때 이야기다.
가령, 평범한 회사원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마법사들이 있는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는 이야기 따위가 대표적이다.
기자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야마'(핵심 줄거리), '마와리'(취재원들 만나기), '반까이'(만회) 등 알 수 없는 말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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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통일외교팀 기자
분명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기자가 처음 됐을 때 이야기다. 일터가 마치 요즘 웹소설과 웹툰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인 ‘이세계’ 같았다. 이세계는 다른 세계를 뜻하는 단어다. 주인공 캐릭터가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갑자기 이동할 때 보통 ‘이세계’로 갔다고 한다. 가령, 평범한 회사원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마법사들이 있는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는 이야기 따위가 대표적이다.
내가 갓 입문한 언론계를 ‘이세계’라고 여긴 것은 언론계가 살아가는 언어, 행동양식 등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 바깥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비공식적으로 쓰는 말이 달랐다. 기자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야마’(핵심 줄거리), ‘마와리’(취재원들 만나기), ‘반까이’(만회) 등 알 수 없는 말을 사용했다. “마와리 돌아도 반까이가 안 되니 일단 취재된 것을 바탕으로 야마를 틀어보자”는 선배의 지시는 초반 몇달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도 몹시 달랐다. 이것은 언론계뿐만이 아니라 언론과 소통하는 홍보·공보업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엠바고, 오프, 백브리핑 등 보도 과정에서 서로에게 제약을 거는 용어들이 연거푸 등장한다. “엠바고 보도자료에 대해 사전브리핑이 있을 예정인데, 엠바고 시점이 풀리면 딥백(인용 불가능, 기사에 풀어서 쓰는 것은 가능)으로 사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비언론계 인물은 많지 않을 테다.
이처럼 우리만의 언어와 문화를 만든 것은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아무리 취재원을 만나봐도 이를 만회할 만한 내용이 나오질 않으니 일단 취재된 것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구성해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기자들의 은어로 이야기하는 게 소통이 빠를 테다. 또한 “보도하지 않기로 한 시점까지는 이 설명 내용을 보도하지 마시고, 그 시점이 지나면 기사에 풀어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말보다는 보도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편리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깊이 우리들만의 문화에 빠져버리면 곤란해진다. 너무도 공급자 중심적으로 생각해 편의주의적인 기사를 작성할 우려가 있어서다. 대표적인 것이 비실명성을 이용한 ‘백브리핑’을 남용하는 것이다. 백브리핑은 발표자의 신원을 익명화해서 조금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관행이다. 취재원의 신분이 공개되지 않으니 일의 내막을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지만, 신뢰도가 떨어지는 우려 또한 생긴다. 특히, 종종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 보면 브리핑까지만 실명으로 이야기를 하고 이후 질의응답에서는 같은 브리퍼가 익명으로 전환해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이름을 밝혔던 인물이 기사 이후에 ‘관계자’로 둔갑한 채 등장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공급자의 편의를 위한 장치가 소비자의 혼란을 초래하는 셈이다.
최근 기성 언론들의 보도들이 유튜브 등 뉴미디어에 밀리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보도 편의주의 때문일 수 있다. 유튜버들에게는 엠바고도, 백블(백브리핑)도 적용되지 않는다. 만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취재원들을 만나기는 하겠지만 정체불명의 일본어를 쓰며 대중과 괴리되지 않는다. 기성 언론도 우리가 스스로 만든 틀을 깨려는 시도가 필요한 때다.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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