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라는 작은따옴표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한겨레 2024. 8. 2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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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주년 광복절인 15일 항일독립선열 선양단체 연합(항단연)이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에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이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권김현영 | 여성현실연구소장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학술대회에서 지난 십수년 동안 반복해서 목격한 장면이 있다. 청중에게 질문의 기회를 주면 누군가 손을 들고 ‘위안부’ 중 어떤 피해자의 증언은 거짓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이것은 질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의 목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진짜 진실’을 알고 있는 자신을 과시하는 데 있다. 이 과시적 질문자들은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라는 형상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경우를 의심할 만한 근거로 제시한다. 속아서 가거나, 알려진 것만큼 감금되어 있지 않았거나, ‘소녀’가 아니었거나, 조선인이 아니었거나, 당시에 받은 군표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한 경우 등이다. 이것이 증언이 거짓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끌려간’ 것은 아니지 않냐는 항변을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끌려간’을 반드시 ‘위안부’라는 명사에 붙은 형용사적 용법으로만 읽으라는 법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편집증적 읽기’다. ‘끌려가다’라는 동사의 시제는 그것이 언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일본군 ‘위안부’가 어떤 일을 했으며 이 사건이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당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을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 사후적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완전한 무지 상태에 놓여 있는 완벽한 피해자만이 이 문제에 대해 피해자로서 말할 수 있다면 그 피해자에게 대체 ‘앎’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신간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의 편저자 김은실은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순수한 피해자라는 범주를 벗어난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위안부’ 문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일종의 편집증적 읽기/판단으로 본다. 퀴어이론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은 비판 이론 전반에서 의심의 해석학에 부여하는 명성이 지나치게 과장된 결과 편집증적 읽기는 새로운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 즉 ‘진단’이 아니라 ‘처방’ 그 자체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어제와 오늘, 내일은 다를 수 없다는 편집증적 시간성의 끈질기고 방어적인 내러티브”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김은실은 세지윅을 인용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판단은 전시 성범죄로서의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적 복잡성을 드러낼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집단 성폭력을 둘러싼 익숙하지만 “위험할 정도로 쉬운” 방식의 가시화에 그치게 한다는 점에서 이분법을 반복하는 폐쇄적인 순환 담론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제도로서의 위안소가 존재했던 것과 그곳에서 남성 군인을 대상으로 여성들이 성적 ‘위안’을 제공하도록 했다는 사실 자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석투쟁의 영역은 이 사건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에 달려 있지 이 사건 자체가 일어났는지 여부에 있지 않다. 그리고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름 붙이기’는 그 자체로 페미니스트 정치학의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안부’에 붙은 작은따옴표가 페미니스트 지식 생산자들이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모순을 견디기 위해 독자들과 나누는 일종의 지적인 표지판이자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부당한 질문은 대상을 물화시킨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피해의 진정성을 반복적으로 주장한 것은 이러한 물화의 결과이자 원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론장은 정치적 교착 상태를 넘어서 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다. 위안소 제도의 반인권적 성격 자체를 부인하는 소위 ‘뉴라이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몇몇 정보를 중심으로 한 역사부정주의라는 망상적 세계관을 마치 남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문제를 간취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것처럼 포장한다. 질문을 빙자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관점을 이동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 혹은 모두라는 말은 대체로 전체주의적 수사가 되기 쉬우므로 지양하는 편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강조하는 의미 이상의 진심을 담아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 나은 논쟁을 할 책임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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