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열정·호기심이 이끈 30년 연구인생… "기초과학은 장기전"
대학원 시절 자유전자레이저에 심취
日서 연구 중 새로운 광학 현상 발견
학술지 소개… 4세대 방사광 개발 기여
방사선 드림팀, 최우수성과에 선정
WCI 뽑혀 양자빔 방사선연구센터 설립
美·日 등 권위자 영입해 국제연구 협력
최고수준 '초고속 전자회절 장치' 개발
보다 멀리보고 호흡은 길게
"'게임체인저' 양자에 전폭지원 필요
미래 성과위해 투자 아끼지 말아야"
이준기의 D사이언스 정영욱 원자력연 하나로양자과학연구소장
지치지 않는 열정과 호기심. 이 두 가지는 30년 넘게 기초과학 연구자로서 삶을 지탱해 준 원천이었다. 연구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지만, 아직도 연구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은 마르지 않고, 오히려 샘솟는다.
해외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열악한 환경에서 국내 최초로 '자유전자레이저'를 개발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한 초고속 방사선 발생장치, 고주파 가속기의 핵심 장치인 고체소자 전원장치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고속 전자카메라 개발에 성공한 것은 이런 에너지 덕분이었다. 마치 훈장과도 같은 값진 연구성과가 빛을 본 것이다.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하나로양자과학연구소장은 공학 중심의 시스템 엔지니어링이 주류를 이루는 원자력계에서 30년 넘게 기초과학 연구자로,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연구 필로그래피를 쌓아왔다. 지금껏 한눈 팔지 않고 한 우물만 판 덕에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대표 레이저·방사선 전문가로 우뚝 섰다.
정 소장은 "기초과학은 당장 성과를 기대하지 어렵지만, 멀리 보면 기대 이상의 성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검증된 연구자에 대한 장기적이고 꾸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인류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기후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초과학 중에서도 양자 분야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물질과 소재 연구가 인류의 건강한 삶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 부장
◇물리학자를 꿈꾼 소년, 광학·레이저에 '매료'
어릴 적 궁금한 게 많았던 정 소장의 꿈은 과학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사다 주신 백과사전 3권을 친구 삼아 곁에 두고, 매일 같이 세상의 궁금증들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기쁨과 희열은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아인슈타인에 대한 문고판 책을 읽고 물리학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정 소장은 "자연이 간직한 수많은 비밀을 아인슈타인처럼 물리학을 통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물리학과를 선택했다"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광학 레이저 등을 공부하면서 기초과학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때는 빛의 간섭을 이용한 광학,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는 지도교수의 영향을 받아 레이저 연구에 매달렸다. 레이저 중에서 당시 첨단 분야에 속한 '자유전자레이저'의 매력에 빠졌다.
자유전자레이저는 고출력의 가속기를 이용해 레이저를 만드는 장치다. 기존 레이저가 기체나 결정체를 매개체로 한 가지 파장만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달리 자유전자레이저는 마이크로파부터 X-선, 밀리미터파까지 광범위한 파장 영역에서 원하는 파장을 만들 수 있다. 출력과 효율도 우수해 군사무기 용도로도 쓸 수 있다.
그는 "당시 미소 냉전 시대에 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자유전자레이저를 활용하려는 연구가 활발했다"며 "지도교수의 권유로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에 가서 자유전자레이저를 처음 접하고,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원자력연 몸담으며 세계적 '자유전자레이저' 연구자로 두각
정 소장은 일본에서 자유전자레이저 연구를 하던 중 우연찮게 새로운 광학 현상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아주 짧은 전자빔 펄스에서 레이저와 같이 강력한 결맞음(파동의 간섭현상) 방사광이 발생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이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좀 더 깊이 있게 지속한 결과, 당시 물리학 분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그는 "논문에 실린 연구로 인해 4세대 방사광 개발에 기여할 수 있었고, 당시 레이저와 광학 분야에서 첨단 연구를 수행하는 원자력연에 입사하는 기회도 주어졌다"고 말했다.
원자력연에 합류한 후 연구 역량이 한층 빛을 더했다. 비록 연구시설과 장비가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미국, 유럽 등에서 실패했던 소형 가속기를 이용한 '고출력 테라헤르츠 자유전자레이저' 개발에 성공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13년 국제자유전자레이저학회가 수여하는 '국제자유전자레이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것이 알려져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정 소장은 "처음 시도하는 자유전자레이저 개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었다"면서 "장치를 개발한 후에는 레이저 발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원인을 찾기 위해 연구실에서 밤을 수없이 지샜고, 집에서 자다가 번뜻 해결책이 생각나면 연구실로 달려가 실험을 반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열정과 노력이 더해진 결과 그 원인을 찾아 실험실 규모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고출력의 X선과 테라헤르츠파를 발생시키는 장치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국제공동 연구로 '날개'… 자연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새로운 눈' 완성
2011년에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국내에서 해외 연구자와 함께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와 인력을 키워내는 정부의 '세계 수준의 연구센터(WCI)'에 선정돼 양자빔 기반 방사선연구센터를 설립했다.
당시 가속기물리·방사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러시아 부드커핵물리연구소의 니콜라이 비노쿠로프 박사를 센터장으로 영입하고,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연구자도 선발해 국내 연구자들과 드림팀을 꾸렸다. 센터는 첨단 가속기와 레이저 기술을 융합해 세계 최초로 소형 극초단 엑스선·테라헤르츠파 동시 발생장치 개발을 위한 원천기술 확보에 나섰다. 연간 25억원씩 5년 간 총 120억원의 예산을 정부에서 지원 받아 국제공동 연구를 펼쳤다.
그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와 함께 신진 과학자를 양성하는 게 쉽지 않은 도전였지만, 해외 연구자들과 소통하고 때로는 논쟁하면서 센터의 연구 역량이 점점 향상됨을 실감했다"며 "센터 운영 5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는 센터 소속 연구자들이 관련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로 성장했고, 세계적 최고 수준의 '초고속 전자회절장치' 개발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 장치는 펨토초(1000조분의 1초)의 매우 짧은 순간에 원자와 분자의 미세 거동을 밝게 관측할 수 있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소재 개발을 위한 물질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연구성과가 국제 학술지에 게재되자, 이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무스메치 미국 UCLA 교수는 "자연을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빠른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됐다"며 연구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이 연구성과는 2020년 국가연구개발 100선과 에너지환경 분야 최우수 성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 소장은 윤석열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국제협력 확대는 필수불가결하다고 피력했다.
그는 "WCI센터를 5년 간 운영하면서, 국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특정 분야의 연구 커뮤니티와 연구자 간 교류·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과학 선진국일수록 자국의 과학자보다 해외 과학자들이 더 많이 활동하는데, 그들과 교류하고 치열하게 토론·논쟁을 통해 처음 계획했던 연구를 보다 발전·진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기초과학이 희망… 양자물질·소재 연구로 인류 문제 해결해야"
정 소장은 30년 이상 기초과학 분야에 몸담아 온 경험을 토대로 기초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업계에서 '슈퍼을'로 불리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을 예로 들며 "ASML의 간판 제품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제가 박사 졸업 당시 ASML이 개발 로드맵을 처음 발표한 이후 20년 넘게 꾸준히 연구개발을 이어온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와 지원은 장기적 관점에서 중단되지 않아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ASML은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개발하기까지 최소 10조원 이상을 투자했고, 많은 인력과 시간을 들였기에 오늘날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긴 호흡과 인내를 갖고, 누구도 하지 않는 새로운 분야에서 검증된 과학자에게 당장의 성과보다는 미래의 더 큰 성과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특히 3대 게임체인저 기술 중 하나로 꼽히는 양자분야에 대한 지원을 보다 전폭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양자컴퓨팅에 집중돼 있는 양자 분야 연구 범위를 양자 물질, 소재 등 우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까지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 소장은 "양자물질 분야는 우리나라에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연구자가 많고, 축적된 연구 역량이 높아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투자한다면 새로운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이라면서 "적은 양으로 우수한 성능을 내는 양자 물질과 소재를 개발하고, 양자분야 전반에 대한 투자와 연구를 확대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술 선도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인 스키팀 3명, 뉴질랜드서 교통사고 사망…"훈련 마치고 이동 중 참변"
- `토크쇼 여왕` 윈프리 `깜짝 등장`…"진실을 자유를 선택하자, 해리스가 답"
- "한밤 중 경찰 3명 찾아와, 아내와 딸 충격"…살해 협박 받은 서경덕 교수
- "사람 치고 나서야 마약 투약 끝나"…`압구정 롤스로이스` 운전자, 징역 2년 추가
- 경찰 `최재영 목사 창간 참여` 매체 수사…북한 찬양·고무 글 게시 혐의
- 미국서 자리 굳힌 SK바이오팜, `뇌전증약` 아시아 공략 채비 마쳤다
- 한화, 군함 앞세워 세계 최대 `美 방산시장` 확장
- 트럼프 `미국 우선주의` 노골화하는데 싸움만 일삼는 정치권
- “실적·비전에 갈린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표심 향방 ‘촉각’
- "내년 韓 경제 성장률 2.0% 전망… 수출 증가세 둔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