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586세대에 “비판 수용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 저버리지 말길”
“아내와 나는 공장에서 처음 만났다. 소위 말하는 ‘학출’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석형은 ‘여공’과 결혼했다. 여공의 딸이 카이스트에 가다니…차마 이 말은 내뱉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가 경멸하는 얼굴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82년생 작가 이미상의 단편 소설 ‘하긴’은 진보적인 교육관으로 자녀를 자유롭게 키우려고 했으나 결국 입시 사교육 전쟁을 주도하게 된 586부모 세대를 신랄하게 조롱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화제작 ‘돌풍’에서도 586 운동권의 신념은 권력의지 앞에서 무너진다. 이른바 엠지(MZ)세대 예술가들이 창작 무대의 중심에 나서면서 진보적인 엘리트 부모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22일 개막하는 제26회 서울여성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애국소녀’도 같은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작품이다. 지난해 디엠지(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부모 세대 이후 다음 세대의 삶과 정치에 대한 고민을 ‘나 자신’의 목소리로 담았다.
“어릴 때부터 공무원인 아빠를 따라서 외국 국빈들 올 때 한복 입고 꽃을 선물하는 화동을 했었고, 여성주의 활동가인 엄마를 따라서 호주제 철폐 집회 등에 나가곤 했어요. 두 가지 의미에서 ‘애국소녀’ 역할을 하면서 자란 셈이죠.”
2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남아름 감독은 지난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를 졸업하며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대학 때부터 뜨겁게 독재정권과 싸우고 뜨겁게 서로 사랑한 85학번 캠퍼스 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된 1995년 11월16일. 영화에서 옹알이 하는 아기들에게 노태우·전두환의 재판 뉴스를 들려주며 “좋은 사람이 돼라”고 얼러주는 엄마는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사로 일해온 페미니즘 활동가다. 아빠는 대학을 마치고 시스템 안에서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가 됐다. 민주적인 가족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부모는 그에게 비빌 언덕이자 뛰어넘어야 할 산이었다.
“세월호, 탄핵, 미투로 북적이는 광장을 경험하며 이십 대를 보냈어요. 그런데 여기에 내 광장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집회에 나가면 ‘기특하다’는 칭찬을 듣는, 내 주체성이 없는 대상 같았고, 세월호 때는 무기력한 아빠를 보며 원망도 하고 좌절했어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시기를 마무리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졸업 작품으로 기획하게 됐습니다.” 아빠가 해양수산부로 일터를 옮긴 직후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그가 부모세대에게 분노를 느낀 결정적 사건이었다. “재수할 때였는데 자율학습 시간이면 여기저기서 흐느낌 소리가 들렸어요. 어버이날 학원에서 부모님께 감사 편지를 쓰라고 해서 아빠가 일하는 세종 청사로 편지를 보냈죠.”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 그가 쓴 손편지에 아빠는 답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빠가 침대 옆 서랍 안에 보관했던 이 편지를 우연히 다시 보면서 작품이 급진전할 수 있었다. 이런 아빠 이야기를 한다는 게 세월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피드백을 받기 위해 416재단에서 주최했던 영상공모전에 기획안을 냈는데 뜻밖에 대상 수상으로 큰 응원을 받았다.
카메라는 아빠와의 갈등뿐 아니라 고민 많고 소심하기도 한 남 감독을 쳐다보는 엄마의 “무서운” 눈길도 포착한다. “엄마는 제가 카메라 뒤에 숨는다고 답답해하고 저를 질타하기도 했어요. 늘 씩씩한 엄마를 보면서 난 저렇게는 못할 거 같다는 짓눌림이 있었죠. 누군가에게 함께 싸우자고 할 때는 초대의 언어가 있어야 하고 각자의 운동 방식은 다를 수 있는데 그런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이른바 586세대의 모순이 아닐까 싶어요.”
‘애국 소녀’는 부모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따뜻하다. 처음 만들었던 버전을 손질하면서 좀 더 둥글어졌다. 딸의 선택을 지지하는 부모에게 미안해서는 아니다.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딸의 질문에 침묵하면서도 딸이 들이대는 카메라를 버텨내는 그의 아버지는 완성된 작품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표현의 자유인데 아빠가 보고 의견을 주면 그게 검열일 것이라고 안 보시더라고요.” 그는 최근 쏟아지는 비판의 한복판에 서 있는 586세대들이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정 안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쳐준 그의 부모들처럼 말이다. 제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8일까지 서울 CGV연남, CGV홍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리며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38개국 132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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