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메달' 가면의 뒤, K스포츠 붕괴는 시작됐다
파리올림픽 폐막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엘리트 체육의 붕괴로 선수단 규모도 적었다"며 "2012 런던 때는 무려 380명이 출전"했다고 말했다. 이번 올림픽 출전선수는 고작 144명이었다. 단체 구기종목은 전멸했는데 여자핸드볼을 제외하면 출전도 못했다. 그는 또 엘리트스포츠에 대한 기업들의 지원이 절실하다고도 했다. 선수도 없고 재정상태도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14일 문원재 한국체육대학교 총장은 메달리스트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이 모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까지 들먹이며 관심을 강요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반복 강조한다. 이쯤 되면 부탁인지 겁박인지 헷갈린다.
그런데 대한민국 스포츠 최고책임자라는 자가, 체육대학 총장이라는 자가 기껏 하는 소리가 "우리를 지원해달라," "돈 더 달라" 수준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이 회장은 '엘리트 체육의 붕괴'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점을 아직도 모르는가. 하긴 '정신력이 문제'라며 대표선수들을 한겨울 해병대 극기훈련 입소시킬 때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인물인지 알아보긴 했다.
이미 구조적으로 붕괴했다
파리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소속을 살펴보자. 한국체대, 용인대 등 극소수 대학과 삼성생명, 대한항공, 코오롱 등 역시 극소수 민간기업을 제외하면 절대 다수는 각지의 군청, 시청, 도청과 시도체육회 소속이다. 그러니까 한국 스포츠는 재벌기업과 중앙 및 지방정부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처박혔다.
외국은 어떤가. 지난 12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Which College Won Olympics?(어느 대학이 올림픽에서 이겼나?)'라는 기사에서 미국 대학들의 올림픽 메달 순위를 매겼다. 1위는 39개의 메달을 가져간 스탠포드대였다. 2위는 23개의 캘리포니아대, 3위는 15개를 가져간 텍사스대, 남가주대, 버지니아대였다.
국가 순위에 대입하면 10위에 해당하는 스탠포드대는 육상, 수영, 조정, 펜싱, 체조, 축구 등 기초종목에서 구기까지 고른 분포를 보였다. 스포츠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하버드대도 메달을 7개나 가져갔다. 영국의 여자 조정 금메달리스트 이모겐 그랜트(27)가 올림픽이 끝난지 3일만에 의사로 첫 출근한 사연이 뉴스로 알려지기도 했다. 외국은 이렇듯 대학생과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등 전문인들이 올림픽에 출전한다. 이들은 우리나라처럼 합숙을 강요당하고 맞아가며 하루 종일 운동만 하는 선수들이 아니다.
스포츠의 핵심은 대표팀이 아니라 성장기 학원스포츠
일본 고교야구 고시엔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화제다. 약 4000개 고교팀 중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학교 3학년 학생 중 몇 명이나 프로에 갈까. 아마도 없거나 기껏해야 한두 명일 것이다. 대부분은 공부해서 대학 가고 그 대학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를 계속한다. 그러다 프로에 가기도 하고. 그래서 일본은 아시안게임 출전팀 전원을 사회인야구선수로 구성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원 프로선수인 한국대표팀과 엎치락뒤치락이다. 몇 년 전 한국으로 여행 온 (동아리 수준의) 하버드대 축구팀은 어려서부터 운동기계로 자란 고려대 축구부를 친선경기에서 2대0으로 가볍게 눌렀다.
우리 스포츠의 문제는 다른 거 따질 것 없다. 선수가 없다. 그냥 없는 게 아니고 대회 출전이 불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어 한국 여고 배구팀은 18개다. 그런데 선수는 200명 남짓이다. 대회 참가엔트리 12명을 채운 팀이 고작 5개 정도. 일본은 여자 고교팀만 3850여 개, 선수는 5만7천여 명. 한국과 일본의 여고 농구 현실도 그냥 똑같다고 보면 된다. 한국스포츠는 이미 기반이 다 허물어졌다. 어느 정도?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종목은 고아원에서 선수 수급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선수가 없는 K스포츠
요즘 자식 운동시키는 부모들의 직업을 보자. 변호사, 교수처럼 지식으로 성공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부분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지식으로 성공한 부모들이 보기에 자식이 운동부에 들어간다는 것은 미래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운동만 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반면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랬듯 사업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자기 사업 물려줘도 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선수 수가 계속 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체육계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협회의 어른들도 못 믿겠고 감독, 코치도 미덥지 않다. 축구아카데미, 태권도장, 복싱도장에서 지도자들이 네 살, 다섯 살 아이를 폭행했다는 뉴스는 하루걸러 나오는 듯하고 성인선수들도 폭력의 도가니에서 결국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어쩌다 자식 운동시키게 된 부모들은 그래서 아이 옷 갈아입히며 신체검사(?)를 한다.) 누가 이런 곳에 자식을 맡기겠는가.
전폭적 지원? 누가 메달 따오라고 등 떠밀었나?
이제 국민은 자신이 즐기는 스포츠 외에 관심 없다. 올림픽? 중계하니 시간 있을 때 볼 뿐이다. 극소수의 선수들을 합숙소에 가둬놓고 가혹하게 운동만 시키는 스포츠가 과연 지속가능할까. 어린 선수들을 혹사, 착취하고,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협회 어른들이 공짜 해외여행하는 협회에 무슨 지원이 필요할까.
대한체육회와 체육계는 당장 혁신하라.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 스포츠 몰락의 주범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정희준 문화연대 집행위원(uppercutrule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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