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때 수감됐다며 독립훈장 보류된 아버지, 국립묘지에 모시고 싶어”

김용희 기자 2024. 8. 2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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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보세요."

김 교수는 1998년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여순사건 때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법정엔 김 교수 뿐만 아니라 함께 재심을 신청한 여순사건 희생자 4명의 유족 10여명도 자리했다.

박씨는 "제 아버지도 여순사건 때 나이가 몇살 더 많았다면 큰아버지(박회순)처럼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며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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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4명 재심 첫 재판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주민들이 오열하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보세요.”

22일 오전 광주지법 순천지원 316호 형사법정. 고 김용덕(1922∼사망시점 불명), 김원식(1928∼1950), 김한동(1915∼1950), 박회순(1932∼1950) 등 여순사건 희생자 4명의 재심 첫 재판이 열렸다. 재판부(제1형사부·재판장 김용규)가 유족에게 발언 기회를 주자, 백발이 성성한 김승일(81) 조선대 명예교수가 한 많은 70년 세월을 토해냈다.

“광주 학생독립운동에 나섰던 아버님의 명예를 되찾고 당당히 국립묘지에 모시고 싶습니다. 자식된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정의를 구현하는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 교수의 아버지 김한동씨는 1929년 광주 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이후에도 그는 항일·노동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여순사건 발생 한달여 뒤인 1948년 11월 갑자기 경찰에 체포됐다. 정확한 혐의는 모른다. 김씨는 ‘미군정청법령’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진주형무소에 수감 중에 가족과 소식이 끊겼다. 김씨는 1950년 7월 중순께 진주시 명석면에서 이승만 정부가 좌익계열 수감자를 대거학살 할 당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1998년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여순사건 때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김 교수는 지난해 9월 재심을 신청했다.

2021년 8월14일 광주광역시 서구 마을카페에서 독립운동가 고 김한동 선생의 장남 김승일씨(왼쪽)씨가 광주시민 명의로 제작된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전달받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제공

이날 법정엔 김 교수 뿐만 아니라 함께 재심을 신청한 여순사건 희생자 4명의 유족 10여명도 자리했다.

여순사건 당시 희생당한 박회순의 조카 박은택씨는 재심 신청인이자 고모인 박순금(79)씨가 전날 세상을 떠나 자신이 유일한 생존 가족이라고 했다. 박씨는 “제 아버지도 여순사건 때 나이가 몇살 더 많았다면 큰아버지(박회순)처럼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며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박회순은 여순사건 당시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49년 사형당한 박창래의 첫째 아들로, 박창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혀 포고령 제 2호(공중치안질서문란)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때 희생됐다.

김용덕은 군사재판을 받았던 여느 희생자들과 달리 민간재판 재심이다. 그는 1948년 10월20일께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1950년 3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금고 3년을 받았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뒤 소식이 끊겼다.

재심신청인인 딸 김수연씨는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해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김용덕의 손녀는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죽음을 경험하며 평생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았다”며 “부디 할아버지가 무죄를 받아 어머니의 한 많은 인생이 보상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다음달 12일 결심에 이어 선고공판을 열 예정이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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