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감옥에서 썩어버렸다”···조작된 간첩, 죽은 뒤에야 누명 벗었다
노모씨(53)는 17년쯤 전 장인어른과 함께 목욕탕에 갔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온통 만신창이인, 그런 몸은 처음 봤어요.” 고인이 된 박모씨(1930년생)의 몸에 전신을 반으로 갈라놓은 듯한 흉터가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흉터는 극도의 폭력이 남긴 흔적이었다. “아버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황한 사위의 질문에 박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박씨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스무 살의 나이로 북한 의용군에 편입돼 북으로 끌려갔다가, 2년 뒤 월남해 자수·귀순했다. 경찰·국방부·유엔군이 뿌린 ‘삐라(대북전단)’에는 “귀순하면 과거지사는 일절 묻지 않을 것이며, 신원을 보장하고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박씨는 목숨을 걸고 전선을 건너왔다.
하지만 박씨를 기다리는 것은 국군 수사관의 고문이었다. 박씨는 허위자백을 강요당해 간첩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복역 16년 만에 가석방됐는데, 출소 1년 전쯤에야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불법 구금된 박씨에 대해 가혹행위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고 22일 밝혔다. 국군 수사관들이 폭행·고문을 하고 조서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한 사실이 인정됐다.
진실규명 뒤에는 사위 노씨의 노력이 있었다. 노씨는 결혼 5년 만에 장인의 과거를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몸이 엉망이 될 정도의 폭력을 당했지만 평생의 짐이라 생각하셨기에 사위에게도 말을 안 하셨던 것”이라고 했다. 노씨는 피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장인에게 “기억을 글로 적어보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2007년부터 2년에 걸쳐 40여쪽 분량의 회고록이 작성됐고 진실화해위에 제출됐다.
회고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지나온 과거는 악몽 같아 다시 회상해 보고 싶지 않다. 1930년생 78세, 80을 바라보는 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무엇을 바라며 필을 들었는가. (중략) 내 인생은 감방 속에서 썩어버렸다. 이제는 흘러간 세월 되돌릴 수 없고 젊음도 되찾을 수 없다. 내 몸을 나무에 비하면 곳곳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노씨의 전언과 회고록을 종합하면 박씨는 출소 뒤 아내를 만나 결혼했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감옥에서 익힌 양복 기술로 양복점을 차렸지만 경찰의 사찰 탓에 오래가지 못했다.
박씨는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 ‘조작된 간첩’으로 사는 고통을 적었다. 그는 “시골은 작아서 소문은 면에 퍼진다. 얼마 지나니 나를 대하는 눈치가 달라진다. 경계하는 눈치, 비웃는 눈치. 아내도 시장에 나가면 여자들이 모여서 수군수군하다가 옆에 가면 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고 썼다.
그는 “과거 북한에서 생활한 것이 죄가 된다면 지금도 이북생활이 싫어 월남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할 수는 없지 않나”라며 “정부에서도 이들에게 생활비를 주거나 취직을 시켜준다는 얘기를 TV나 신문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일평생을 굴레를 쓰고 살아야 하나. 얼마 남은 인생이지만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게도 떳떳한 남편으로 하루라도 살다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노씨는 장인의 피해가 진실화해위에서 인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기자와 통화하면서 “정의라는 게 있다는 걸 오랜만에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장모님도 울컥하시고, 아내도 제게 끝까지 신경써줘서 고맙다더라”고 말했다. 노씨는 장인의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 신청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노씨는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결정에도 불구하고 후속조치가 없어 재심 신청을 피해자·유족이 직접 알아봐야 한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진실화해위 결정이 권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명예 회복 조치로 이어져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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