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부족하지만 행동의 의지 있기에…우리는 취약하다 [말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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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흠집 많은 막걸리 잔이다.
이를 '취약' '취약성'으로 번역하는데, 이 말이 '취약 계층, 취약 집단'처럼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강화하는 언어로 쓰이지 않냐는 지적이었다.
'이 나약한 인간아!' 우리 모두는 취약하지만, 우리 모두는 나약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취약하다'는 말은 그래서 긍정적이고 전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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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흠집 많은 막걸리 잔이다. 새롭고 진전된 개념이 발명되어도 주름 잡힌 자국을 두텁게 간직한 말을 그대로 재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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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권 실현을 위한 시민단체 ‘시민건강연구소’의 연구원이 질문을 해 왔다. ‘상처 입을 가능성’이란 뜻의 ‘vulnerability’(벌너러빌리티)라는 영어가 있다. 이를 ‘취약’ ‘취약성’으로 번역하는데, 이 말이 ‘취약 계층, 취약 집단’처럼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강화하는 언어로 쓰이지 않냐는 지적이었다.
맞다. ‘취약(성)’에는 체제에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가 있다. 하지만 ‘돌봄의 윤리학’에서 취약성을 ‘약자’로 지목된 사람의 개인적인 무능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사회적 의존성의 복잡한 시스템 없이는 홀로 존립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기대고 있기 때문에 ‘취약하다’(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언어학적으로도 ‘취약’은 꽤 괜찮은 번역이다. ‘취약’에는 관계성과 사회성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습기에, 공격에, 홍수에 취약하다’라는 예에서 보듯, 늘 ‘무엇에 대한’ 취약이다. 비슷한 말인 ‘나약’ ‘유약’ ‘연약’에는 이런 관계성의 실마리가 없다. 그저 개개인의 특성을 지목할 뿐. ‘이 나약한 인간아!’ 우리 모두는 취약하지만, 우리 모두는 나약하지는 않다.
취약한 사람은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지만, 행동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취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연대하고 행동한다. 취약한 사람은 결여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더 나아진다. ‘우리 모두는 취약하다’는 말은 그래서 긍정적이고 전복적이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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