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푸틴을 막후에서 움직인 책사…배넌과 두긴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유비에겐 제갈량이, 조조에겐 사마중달이 곁에 있었다. 유방은 장자방의 도움을 받아 한 제국을 건설했다. 반면, 범증을 내친 유방의 적수 항우는 '해하가'(垓下歌)를 부르며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일인자나 그에 걸맞은 자리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옆에는 정책을 만들고 때에 따라 계략을 쓰는 책사들이 늘 있었다.
대통령을 지냈고 또 한 번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곁에도, 20여년 간 러시아를 실질적으로 장악해 '차르'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책사가 있다.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와 러시아 철학자이자 극우 사상가인 알렉산드르 두긴이다.
배넌은 공대를 나와 해군으로 복무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특히 철학과 종교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고대 아시아의 종교를 포함해 신비 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그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거나 수량화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라거나 "인류 역사가 물려준 오랜 종교적 가르침에서 배워야만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지녔다. 배넌은 훈련차 홍콩에 머물다 고서점에서 운명적인 책을 만났다. '전통주의'(Traditionalism)를 확립한 프랑스 신비주의자 르네 그농이 쓴 '인간 존재와 생성: 베단타학파의 지혜'였다.
두긴은 10대 때부터 '유진스키 서클'이라는 조직에 가입해 활동했다. 파시즘, 나치즘, 내셔널리즘, 오컬트주의, 신비주의가 뒤섞인 강령을 가진 모임이었다. 회장은 히틀러처럼 '총통' 흉내를 냈고, 회원들은 나치 제3제국 군복을 차려입고는 '하이 히틀러!'를 외쳤다. 유진스키 클럽의 회장은 그농의 추종자였다. 두긴은 선배들로부터 그농의 사상을 익혀 체화했다.
미국과 러시아를 배후에서 움직인 배넌과 두긴의 공통 분모는 그농이라는 사상가다. 힌두교에 뿌리를 둔 '전통주의'라는 극우 사상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이탈리아 남작 출신 율리우스 에볼라 등이 계승했고, 오늘날 배넌과 두긴에게 이어졌다.
'전통주의자'들은 힌두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역사가 네 가지 시대를 거치며 무한히 반복한다고 믿는다. 성직자가 지배하는 '금의 시대', 전사 계급이 지휘하는 '은의 시대', 상인들이 주도하는 '동의 시대', 노예들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다.
신정과 귀족정을 거쳐 부자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끝나면 무지한 대중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 같은 폭정의 형태, 즉 암흑의 시대가 도래한다. 암흑의 시대는 산스크리트어로 '칼리 유가'(Kali Yuga), 즉 '말세'를 뜻한다.
배넌과 두긴이 바라보는 작금의 세상은 '말세'다. 정상적인 세상이라면 '카스트'적인 위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통치되어야 하나 지금은 통치 주체가 위계 없이, 각 신분과 계층이 뒤섞이면서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생겨나 평등이 강조되고, 정치인은 온통 경제(돈)에만 정신이 팔렸다. 설상가상으로 남반구에서 북쪽을 향한 대량 이민이 발생하는 바람에 전 지구적인 "인류 흑화"가 벌어지고 있다. 페미니즘과 세속주의 탓에 문화는 타락했고, 성적 쾌락주의도 만연하다. 한마디로 현재는 모든 '질서'가 무너진 상태다.
배넌과 두긴은 이런 물꼬를 되돌려 '금의 시대', 즉 신정일치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힌두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너무 먼 미래에 발생할 일이다 보니,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내셔널리즘, 인종주의, 자본주의 등 다양한 우파 정책을 전통주의에 뒤섞었다.
이에 따라 배넌은 백악관에서 근무하며 이민자를 줄이고, 노동계급을 구하기 위해 경제에 중점을 두는 정책에 신경 썼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손잡고 서방 전통을 대표해 중국, 튀르키예, 이란 무리에 맞서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배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막후에서 남오세티야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조종한 두긴은 러시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유럽연합을 쪼개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영원의 전쟁'(War For Eternity)은 트럼프와 푸틴의 책사 역할을 하는 배너와 두긴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오늘날 급부상하는 전통주의·우파 포퓰리즘의 사상지도를 그려낸 르포르타주다. 미국 콜로라도대 민족음악학 교수이자 인류학자인 벤저민 타이텔바움이 배넌과 두긴을 만나 그들의 사상적 뿌리를 추적했다.
소설처럼 긴박한 내용 전개와 두 인물에 대한 서술이 흥미를 자아내는 책이다. 더불어 미국과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일과 그 막후에서 전개된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러시아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지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생각거리도 책은 제공한다.
글항아리. 김정은 옮김.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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