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해결못한 오일쇼크… 사우디 달려가 ‘담판’

장병철 기자 2024. 8. 2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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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위복 리더쉽’ 최종현에 묻다 - <中> ‘국가위기’ 해결사
선경, 섬유→석유 확장 큰그림
사우디와 6년간 우호관계 구축
원유 급등·OPEC 공급 축소에
현지 정부 찾아가 끈질긴 설득
국난 이기고 에너지 안보 다져
그래픽=권호영 기자

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1차 오일쇼크의 한파가 불어닥친 1973년은 선경 창립자이자 고 최종현 선경그룹(SK그룹 전신) 선대회장의 맏형인 최종건 회장이 폐암으로 타계한 무렵이기도 하다. 최종건 회장이 눈을 감기 한 달 전부터 한국 경제는 오일쇼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두 달 사이에 원유 가격이 4배로 치솟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대한석유공사,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등 한국의 정유 3사에 원유 공급을 줄이겠다고 통보하면서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한국 정부는 당시 김종필 총리를 포함한 민관사절단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급파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 최 선대회장이다. 최 선대회장은 선경그룹의 석유산업 사업을 진두지휘하면서 이미 사우디 왕족은 물론 사우디 정·재계 인사들과 끈끈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최 선대회장은 즉시 정부 사절단의 선경 측 실무자였던 김창호 전 SK유통 사장을 사우디에 남겨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극적 합의를 끌어내 우리나라는 사우디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아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란의 석유 수출 중지 조치로 1978년 말부터 1979년까지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진다. 당시 원유 재고가 바닥이 나자 서울 시민들은 남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난방을 해결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 해결사로 나선 것도 최 선대회장이다. 사우디와 6년에 걸친 굳건한 신뢰 관계를 맺었던 선경과 최 선대회장이 막후에서 민간 외교 역할을 한 끝에 우리나라는 당시 배럴당 42달러에 거래되던 원유를 24달러에 하루 5만 배럴씩 공급받으면서 2차 오일쇼크를 극복할 수 있었다.

최 선대회장이 1960년대 당시 대한민국 경제 인프라 중 가장 취약한 고리는 ‘에너지’라는 판단에 따라 일찌감치 석유 사업을 미래 핵심 사업으로 선정하고 본격적인 대비에 착수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나라는 제조업부터 물류까지 전 산업 구조가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면사와 면섬유 사업을 하던 선경은 1960년대 말 석유에서 뽑은 실인 원사의 등장으로 사업 재편에 속도를 올렸고, 결국 1969년 폴리에스터 사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석유 사업에 진출했다. 특히 선경은 ‘에너지 경쟁력은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 아래 국가 에너지 안보를 책임질 석유 확보 청사진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중동의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와의 교류를 확대한 것도 이때다. 그는 사우디 왕족의 요청으로 현지 석유화학 공장 건설에도 200만 달러를 투자했다.

SK그룹이 에너지 분야에서 사업 ‘백년대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최 선대회장의 이 같은 선구안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 유공에서 출발한 SK이노베이션은 석유화학, 윤활유, 석유개발사업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한 데 이어 최근에는 전기차 배터리와 소형모듈원전(SMR) 등 미래 에너지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국내 최대 에너지 회사로 거듭났다.

최종현(앞줄 오른쪽 세 번째) 선경그룹(SK그룹 전신) 선대회장이 1981년 초 선경종합건설을 방문한 사우디 석유장관( 〃 두 번째)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제공

■ 신군부 ‘유공 인수’ 리스트에 없었지만… 산유국 인맥 ‘능력 입증’

당시 경쟁기업은 멕시코 공략
국유화 우려에 감점요인 작용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자로 선경그룹(SK그룹 전신)이 최종 확정됐음을 발표한다.”

1980년 11월 28일 당시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이 국영 기업인 대한석유공사의 최종 인수자로 선경그룹이 선정됐다고 발표하자 재계가 술렁였다. 당시 유공은 연 매출 1조 원이 넘는 국내 유일의 초대형 기업이었지만 부채비율은 1000%를 넘어서며 민영화 대상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재계 순위 등 외형만 보면 선경그룹(당시 10위권 밖)이 대어를 낚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고, 박 장관의 최종 발표에 모든 사람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유력 후보로 떠올랐던 경쟁사들은 특혜 의혹을 제기하며 선경이 과연 자신보다 수백 배나 큰 유공을 정상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는 선정 배경으로 “선경은 우리나라 종합상사로서는 처음으로 상당량의 원유를 유공에 공급했고, 앞으로 원유 추가 확보의 잠재력이 있으며, 산유국과의 친분도 두터워 오일머니 유치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고 제시했다. 그런데도 경쟁 그룹들은 인수 과정에서 신군부가 선경 측에 힘을 실어줬다는 의혹을 지속해서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경쟁 그룹의 로비를 받은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군부가 선경 대신 경쟁 그룹에 힘을 실어 줬다는 핵심 관계자의 증언이 나오면서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이와 관련, 월간조선은 2010년 3월호에서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증언을 실은 바 있는데, 안 전 수방사령관은 해당 기사에서 “모든 조건이 선경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유공을 경쟁 기업에 넘겨 주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경쟁 기업은 멕시코로부터, 선경은 사우디로부터 원유를 도입하려고 했는데, 당시 멕시코는 좌파 정권이라 국유화될 경우 석유공급 이슈가 생길 수밖에 없어 최종적으로 선경이 낙점됐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대기업들이 자산 규모와 현금 동원력만 중시했지만,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오랜 기간 쌓아온 최대 산유국과의 강력한 인맥을 통해 원유 확보 능력을 직접 입증해 보였다”고 말했다.

최 선대회장은 재계에서는 전무후무하게 그룹 회장인 본인이 직접 유공 인수 후 초대 사장을 맡아 3년을 경영했다. 이 기간 동안 유공 매출은 약 40%나 증가했으며, 만성적 적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1160%에 달했던 부채비율은 3년 만에 391%로 줄었다.

장병철 기자 jjangbe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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