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실종된 정치와 중도[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흔히 광복절은 국민통합과 화합의 장으로 불린다. 일본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그 과정에서 분열됐던 국민들이 서로를 향해 낸 생채기를 보듬고 대통합을 이루는 경축의 자리가 돼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여전히 분단된 현실 속에 동족상잔과 이산가족의 비극을 끝내고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라는 염원도 담겨 있다.
● 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실종된 정치와 중도
하지만 올해 광복절은 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정부 주최 경축식에 광복회를 비롯해 범야권이 불참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종찬 광복회장 등은 뉴라이트 성향으로 지목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대통령실과 정부는 “정상적 채용 절차에 따른 임명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맞섰다.
15일 당일 아침까지 기대했던 ‘이변’은 생기지 않았다. 당초 광복회 측 요구조건은 불공정한 임명 과정에 대한 사과와 건국절 추진을 안 한다는 확답 등 두 가지였는데 광복절 전 주말을 지나고 김 관장 사퇴로 바뀐 것으로 전해졌다. 초기 설득을 통한 협의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광복절 당일 쪼개진 행사를 보면서 국민들은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쟁에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정치가 실종됐다는 걸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번 갈등도 시작은 인사 문제였다. 대통령이 굳이 뉴라이트 성향으로 지목된 인사를 임명한 것도, 김 관장의 자진 사퇴 카드를 선택지에서 제외시킨 채 인사 원칙만 고집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반쪽 광복절’에 대해 “특정 단체가 인사 불만을 핑계로 해서 빠졌다고 해서 광복절 행사가 훼손된다고 보지 않는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발언도 ‘마이 웨이’를 가겠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이 화해와 포용, 통합을 가로막는 것 아닐까. 그간 윤 대통령이 26차례나 야당의 동의 없이 인사청문 대상 후보자를 임명 강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권만 탓하기도 어렵다. 정당한 사유 없이 대통령 탄핵을 운운하고 그간 인사청문회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막말과 인신공격으로 몰아가는 것은 야권의 고질적 문제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건희 여사 살인자”라는 강경 발언을 한 전현희 최고위원에게 오히려 표를 몰아주는 것도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진보와 보수 진영에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양극단의 대치는 공고해져가는 모습이다. 그럴수록 여야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고 중도파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 26번째 장관급 임명 강행은 여야의 ‘불통 합작품’
결국 인사가 만사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인사를 두고 매끄럽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 윤 대통령은 김용현 전 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고 신원식 국방부 장관을 국가안보실장으로, 장호진 전 국가안보실장을 대통령외교안보특별보좌관으로 순환 보직시켰다.
김용현 후보자는 윤 대통령의 충암고 1년 선배로 대선 캠프에서 안보정책을 총괄했고 청와대 이전 태스크포스(TF) 경호경비팀장을 맡아 ‘용산 이전’을 주도했다. 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허위 선동” 등을 언급한 다음날인 16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며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야당 공세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는 질문에 “정치 선동에 불과하다”고 찰떡 호흡을 과시했다.
보수 진영에서 강성으로 분류되는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등 인사를 놓고도 야당 내에선 “반대할 인사만 대통령이 지명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윤석열 정부 들어 야당의 반대로 국회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장관급은 26명으로 늘었다. 불통이라는 비판을 받던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총 34명이었는데, 현 정부는 임기 절반을 채우기 전에 이미 76% 수준에 달하게 된 것. 취임 2년 3개월 같은 기간을 비교해도 문재인 정부 시절엔 23명으로 현 정부의 임명 강행(26명)이 더 많다. 역대 정부에서 국회 동의 없이 임명을 강행한 인사는 노무현 정부 3명, 이명박 정부 17명, 박근혜 정부 10명 등이었다.
특히 이진숙 위원장 임명 당시 눈에 띄는 것은 대통령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재송부 시한이었다. 김홍일 전 방통위원장 때와 마찬가지로 이진숙 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재송부 시한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 김 전 위원장 전에는 최소 사나흘은 주는 게 관행이었다. 당초 여야가 다시 논의해 합의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재송부 시한을 두는 것이지만 여야 협치가 실종되다 보니 형식적 절차에 그치게 된 것이다.
협치가 실종되면서 국회의 인사청문회제도가 무력화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후보자의 능력이나 도덕성이 국민 눈높이에 맞는지를 따지기 위한 청문회는 형식적인 관문에 그쳤다. 야당은 이 위원장의 대전MBC 사장 시절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 흠집내기에 바빴고 여당은 “MBC 등 방송개혁의 적임자”라며 엄호하는 데 급급했다. 여론의 추이를 보며 국민 다수의 생각을 고려하던 과거 청문회와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방통위 뿐만 아니라는 점이다. 총선 이후 교체설이 나돌던 한덕수 국무총리는 유임됐다. 새 후보자를 임명할 경우 야당의 비협조로 임명동의안 본회의 통과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 총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대안을 찾지 못해 유임한다는 건 본말전도다. 관리형 총리로 불리는 한 총리가 2년 3개월째 내각을 총할하다보니 총선 패배 이후 쇄신은 커녕 공직사회의 긴장감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협치의 키를 쥔 건 윤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거대 야당이 납득할 만한 인사를 단행해야 되고 설득과 협의를 통해 인사를 관철시켜야 한다. 영수회담 등 야당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국정과제 관련 법안 통과를 이끌어내고 윤석열 정부의 성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총선 직후 대통령실에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각각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윤 대통령도 협치에 대한 의지는 여전할 것이다.
2022년부터 올해까지 세 차례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는 ‘통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2022년 경축사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며 통합의 필요성을 언급한 적은 있습니다. 광복절에 통합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진부한 표현이어서 뺐다면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지난해 경축사에는 ‘공산 전체주의’와 ‘반국가세력’이 등장했고 올해는 ‘허위 선동’ ‘반통일세력’ 등을 거론하며 범야권을 겨냥한 듯 날선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22년 5월 국민의힘 의원과 장관, 대통령실 참모들과 함께 특별열차를 타고 광주에 내려가 5·18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피로써 지켜낸 오월의 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광주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도 제창했고 보수정부에서 5·18 기념식에 당정과 대통령실이 총출동한 것은 처음이었던 만큼 많은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습니다.
윤 대통령이 당시처럼 국민 통합에 대한 초심을 지켰다면 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권과 야권이 각각 일방독주만 할 게 아니라 여론과 민심의 무게를 생각하며 싸울 때 싸우더라도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며 함께 가는 길을 걷기를 희망해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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