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앞 버스 들이받은 뒤…“한명이 뒷문으로 탈출” [인터뷰 ②]

고경태 기자 2024. 8. 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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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 당시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 모습. 실미도 공작원들이 탈취한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서 있다. 이제는말할수있다 화면 갈무리
2024년 8월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경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은 14일, 17일, 19일, 20일 전화로 2시간가량 진행한 백동호 작가와의 일문일답.

1970년대 용산역 앞에서 처음 만나

― 소설 ‘실미도’에 실미도 부대 출신으로 나오는 강인찬의 모델이 된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소설에서 픽션과 사실의 경계는 무엇인가.

“용산역 앞에서 ‘양아치’로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대북침투 부대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녔고, 거기 다녀온 사람들을 영웅 취급하던 때다. 당시 대북침투부대 모집관들이 서울 양동 사창가와 남영동 굴다리 앞 노동자 합숙소,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녹십자 혈액원 등을 돌며 사람들을 모으러 다녔다. 당시엔 고아가 많던 시절이다. 체격이나 깡다구가 좋아 보이면 몇 명 찍어서 살짝 따로 불러내 ‘국가를 위해 봉사하지 않겠냐’며 장밋빛 약속을 해 데려가곤 했다. 물론 전혀 지켜지진 않았지만.

그때 강인찬의 모델이 된 인물을 처음 만났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도 들었다. 그게 실미도 부대였다. 그때가 1970년대였는데, 10여년 뒤인 1980년대 교도소에 들어가서 우연히 운동하다가 재회했다. 그리고 교도소 나와서도 도합 7~8번은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고 소설까지 쓴 거다. 소설 속엔 강인찬이 대북침투부대 지원하러 갔다가 퇴짜당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건 내 이야기다. 또 킬러로 그려지는 등 소설 속 강인찬의 행적 중에 창작된 부분이 많다. 분명한 진실은 그 모델이 된 인물은 1971년 8월23일 실미도 공작원들이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가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다.”

실미도 부대 실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탈취한 버스 멈춰 선 뒤 도망갈 시간 충분했다

― 당시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나.

“사람들은 실미도 공작원들이 서울로 향하다가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다. 1차 육군(33사단 병력)과 2차 경찰(노량진경찰서 소속)의 총격이 있었으나 이를 뚫고 가다가 그만 가로수를 들이받고 선 것이다. 실미도 공작원들이 실미도에서 배를 타고(서너명의 공작원들이 무의도에 가 실미도로 배를 끌고 옴- 필자 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로 가는 과정에서 군은 제대로 막지를 않았다. 유한양행 앞에서 공작원들을 태운 버스가 멈춘 것은 오후2시20분인데, 한참 동안 군경이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유한양행 앞 공작원 탈출설은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사건 당일 배재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박OO씨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가던 중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버스 안의 여학생이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자 10~20분간 현장에서 부상자를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2006년 3월26일과 6월27일 국방부 과거사위 면담조사에서 “버스 뒤 창문을 열고 한 명이 뛰쳐나와 도망갔다.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사람도 없고 민가도 없는 맞은쪽 길(철길) 건너로 도망갔다”고 진술했다. 박씨에 따르면 군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뒤 10~20분 뒤였다. 현장을 빠져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증언했던 박OO씨는 1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량진에서 영등포에 있는 연흥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다가 버스가 반대편 차선을 넘어 버스가 가로수에 부딪히는 장면을 목격했고 구조작업을 했다. 창문을 통해 철길로 가던 남자의 모습도 분명하고 생생하다”며 18년 전의 증언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는 현재 한 법무법인의 대표를 지내고 있다.

3회(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54980.html)에서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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