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잡아먹고 연명한 실미도 ‘반전’…“최소 3명 살아서 탈출” [인터뷰 ①]

고경태 기자 2024. 8. 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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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53주년] 영화 원작소설 쓴 백동호 작가
“애초 북 올라갈 생각 1%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
국방부, 잇단 증언에도 생존설 부인
2024년 8월23일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김일성 암살을 위해 극비리에 만든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은 섬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서울 청와대로 진격하다 자폭했다.

반세기 만인 오는 9~10월께 국방부 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사과는 경기도 벽제리 공동묘지에서 열리는 사형집행자 유해발굴 개토제 때 ‘국방부 간부의 대독’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방부 쪽은 사과 내용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라고만 밝혔지만, 모호하고 형식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실미도 사건은 불법 모집에서부터 훈련 중 인권침해, 부식비 횡령, 사형집행 및 암매장 등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국가범죄였다. 만약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면 이 역시 사과해야 할 범죄에 해당한다. 한겨레는 실미도 사건 53주년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발표를 앞두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다 죽지 않았다. 최소한 3명이 그날 살아서 탈출했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웠던 ‘실미도’(감독 강우석)의 소설 원작자 백동호 작가(68)의 말이다. 그는 실미도 사건 53주기를 앞두고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2003년 영화 개봉 직후 여러 언론에 밝혔던 ‘실미도 공작원(훈련병) 생존설’을 거듭 주장했다. 20여년 전과 다른 점은, 그 생존자가 2006년 사망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겨레가 공작원 이름 3명(임기태, 박응찬, 정은성)을 추린 뒤 그중 생존자가 있냐고 하자 “그중에 있다. 세 사람 다 탈출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본인이 목격한 생존자의 실제 삶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도 했다. 실미도 사건 53년, 소설 출간 25년 만에 생존자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증언을 한 셈이다.

영화 ‘실미도’에서 강인찬으로 나온 설경구. 한겨레 자료사진

문제의 생존자는 1999년 출간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와 2003년 같은 이름으로 개봉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강인찬’(영화에서는 설경구 분)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소설 ‘실미도’는 금고털이로 교도소에 수감된 주인공 백동호가 감옥 안에서 실미도 부대 출신인 강인찬을 만나 사건의 전모를 듣게 된다는 내용이다.(실제로 작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절도와 금고털이로 교도소를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백동호 작가는 강인찬의 모델이 된 인물을 만나 소설의 영감을 얻었으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실미도 기간병과 군 관계자 등 수십명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1999년에 소설 ‘실미도’를 쓴 백동호 작가. 12년 전 모습이다. 본인 제공

“홧김에 만들고 버린 부대”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북한산을 통해 서울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맞대응하려 같은 해 4월 똑같은 31명의 숫자로 만든 ‘김일성 암살’ 특수부대였다. 정확한 명칭은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교육대)로, 인천 중구 무의동의 무인도 실미도에 세웠다.

하지만 부대 창설 3년4개월 뒤인 1971년 8월23일, 이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인천에 상륙한 뒤 북한의 김일성이 아닌 남한의 박정희와 만나 담판을 짓겠다며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청와대로 진격한다. 열악한 처우에 대해 높은 사람에게 항의하겠다는 취지였다.

“애초에 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1%도 없으면서 홧김에 만든 부대였다.”

백동호 작가가 한 줄로 정리한 실미도 부대의 본질이다. 당시 베트남 전선에서 허덕이던 미국은 한국에서 또 다른 전선을 확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미-중 관계 등 세계정세도 화해 무드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미도 부대를 기획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경질됐고, 김계원에 이어 이후락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실미도 공작원들은 배를 곯으며 뱀을 잡아먹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 속에서 점차 버려졌다. 비밀리에 모집한 공작원들은, 이제 국가 입장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져줘야 할 존재였다.

백 작가는 “강인찬 모델이 된 사람은 1971년 8월23일 오후 2시15~20분께 공작원들이 두 번째로 탈취한 시내버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섰을 때 버스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버스 안에서 일부 공작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그는 “강인찬 말고도 여럿이 유한양행 앞에서 탈출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2004년 2월 충북 옥천에서 실미도 사건 공작원 유족들과 만난 백동호 작가(맨 오른쪽)의 모습. 연합뉴스

과거사위 조사관 출신도 “최소 3명은 생존”

실미도 공작원 생존설은 허무맹랑하게 비칠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방부뿐 아니라 대통령 직속 기구였던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국방부 과거사위, 2005~2007년)도 최종 보고서에서 “공작원의 생존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으로 실미도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는 한겨레에 “공작원 생존자설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나 역시 최소 3명 이상 생존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보고서를 작성할 때 위원회 상부에서 이에 대해 질색을 해서 넣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왜 실미도 공작원 생존설은 사건 발생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에도 식지 않을까. 한겨레는 당시 사건의 전개과정을 복기하면서 생존설의 진위를 살펴보았다. 백동호 작가는 당사자와의 약속 때문에 강인찬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공작원 31명의 사망 시점과 유가족 출현 여부 등을 분석하면서 강인찬의 후보군을 좁힐 수 있었다.

2회(https://hani.com/u/OTI3NA)에서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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