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자 채워졌다” 민락수변 빨간벽돌의 멋
각종 공연·팝업스토어로 채워진 ‘밀락 더 마켓’
지역의 일상과 접목해 공공적 가치로 확장 고민
‘작은 도시 광장에 있는 듯’ 남측면 전체 통유리
진정한 비움있는 종교 건축도 도전해보고 싶어
부산 수영구 광안리 해수욕장 동쪽에 위치한 매립지. 2022년 이곳에는 빨간 벽돌에 박공형 지붕(책을 엎어놓은 듯한 삼각형 지붕)의 거대한 창고형 건물이 지어졌다. 주변 고층 건물들처럼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용도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겨우 2층에 속은 텅 비어 있어 준공 당시 인근에서 화제가 된 곳이기도 하다.
건물을 설계한 이승진 엘제이엘(LJL)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용적률이 450%까지 가능한 땅이었지만 70% 수준으로 지어졌다”면서 “많은 투자자와 시행사가 주거시설을 짓자고 제안했지만 건축주인 박지만 삼미 대표의 바람에서 문화와 음식, 패션 등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을 짓게 됐다”고 건물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이 건축사는 개소 이전 대형 법인인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13년간 근무했다. 계획부터 준공까지의 과정이 긴 것은 물론 역할도 제한적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늘 퇴사에 대한 생각을 가슴 한켠에 품고 있었다. 온전히 나만의 것을 짓고 싶은 까닭이다. 그러던 와중 희망퇴직 신청이 떠 퇴직을 결심하게 됐다. 밀락 더 마켓은 퇴직 후 첫 프로젝트인 탓에 더욱 애정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건축주인 삼미그룹은 1980년대 바다 매립 사업으로 이 땅을 확보했는데, 활용안을 놓고 회사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해 오랫동안 나대지로 놔둔 상황이었다. 발주처인 박지만 삼미 대표는 설계를 맡기며 저층의 수평적 랜드마크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 공간을 나눌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강조했다.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건축주의 믿음은 프로젝트의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사업성만 따져서는 불가능한 설계였다.
7720㎡의 거대한 땅에 건물주의 확고한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이 건축사는 비워내고 덜어지는 공간, ‘디자인 없는 디자인’에 가치를 두고 접근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건물은 각종 팝업스토어로 채워졌고, 각종 공연들이 펼쳐지는 민락수변로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근방에서 MZ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건축사는 “건물 앞으로는 지역 어민들이 이용하는 어촌계 항구가, 뒤로는 아파트가 위치한 곳“이라면서 ”바다와 도시가 만나는 드라마틱한 장소에 둘 사이의 간극을 연결시킬 방법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이 해답을 찾고자 이 건축사는 설계계약을 마치고 부산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찾게 된 것이 부산 영도 부둣가에 있던 창고건물들이었다.
인근 주거지에서 바다 조망이 가려지지 않는 높이로 지어진 건물은 고층 건물과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부산항 수변과 완벽한 조화를 이끌어 냈다. 박공지붕은 해변을 산책하는 보행자들에게 시각적인 위압감을 주지 않도록 3개로 나눠놨다. 과거 부지 인근에 있었던 활어상과 노점상의 기억은 마켓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재구성됐다.
건물 내부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게 해둔 남측면 공용 홀을 설계하는데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남측면 전체가 통유리로 제작된 만큼 내부이지만 외부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커다란 계단, 전면 커튼월을 적용했다. 공간의 확장성을 위해 바닥과 계단을 외부의 재료와 똑같은 빨간 벽돌을 이용했다.
이 건축사는 “건물 안에 들어왔다는 인상보다는 작은 도시 광장에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면서 “낮에는 공연장으로 저녁에는 디제잉이 이뤄지는 클럽으로 바뀌기도 한다“고 쓰임새를 설명했다.
하지만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전면 통유리는 1년에 부산을 수차례 찾아오는 태풍에 취약한 구조이기도 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 건축사는 건물의 바다를 접하는 부분에 앞마당을 설치하고, 건물을 뒤로 밀었다. 또한 유리가 파손되는 것을 막기위해 프레임의 간격을 줄이기도 했다.
그는 “유리 간격을 촘촘하게 해 개방감이 떨어지는 아쉬움은 있지만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닥쳤을 때 주변 건물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밀락 더 마켓은 피해가 없었다“고 기억했다. 실제로 당시 인근 오피스텔들은 1층 유리창이 박살나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밀락 더 마켓의 피해는 거의 없다는 점이 지역 언론에 보도 되기도 했다.
밀락 더 마켓은 수변의 공공성과 상업성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부산다운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상업건물이 자본의 속성 속에서도 지역의 일상·편안함과 접목해 공공적 가치로 확장될 수 있는 점을 고민해오고 있다”고 답했다.
최근 좋지 못한 건축경기는 이 건축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용산구 이태원동 2층 집을 5층 건물로 야심차게 증축하려했던 ‘골목끝집’ 작업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갑자기 무산되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리모델링 해야 했다.
“건물은 1969년에 준공한 연와조 주택으로 당시 용산구청장의 사택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큰 돈을 들여 튼튼하게 지은 만큼 상태가 좋아 신축에 버금가는 증축 리모델링으로 설계가 착수됐죠. 하지만 급격한 금리변동과 함께 크고 작은 금융계 악재들이 터지며 공사를 위한 대출이 불가능해서 결국 예산은 당초에서 4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이 건축사는 설계비를 감액해 가면서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해 냈다. 시공 과정에서는 본인도 직접 나서 자재를 나르고 지인들에 시공을 부탁해 공사비를 줄이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을 최소한으로 수선하고 기존의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것들을 고민해야 했다. 건축주로서는 공사중단을 원할 수도 있었지만 지인이던 참에 토지 매입때부터 함께 찾으러 다녀 애정이 담긴 프로젝트였다.
확연한 외관 변화를 위해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불법 건축물들을 떼어내고 ‘재생’이라는 가치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건축사는 “뭔가를 계획해 채우기 보다는 못생긴 것들을 전부 걷어내고 피부를 매끈하게해 원래 건축물의 모습을 찾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밀락 더 마켓에서 추구했던 ‘비움’, ‘텅 빈 공간’에 대한 아름다움을 158㎡ 작은 공간안에서도 구현해 내고자 했다. 불법 건축물을 뜯어내니 예쁜 테라스가 나왔다. 테라스에는 곳곳이 부식된 난간들이 있어 보강을 해주기로 했다. 곰팡이로 얼룩진 미장을 뜯어내니 연와조 구조가 나왔고 벽돌 전부를 노출시키기로 했다. 그곳에는 1969년 건물이 지어질 당시 만들었던 상량문도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민낯이 드러난 60년대 건축물은 무엇을 그려넣었도 작품을 돋보이게 해주는 하얀색 도화지 같았다. 결국 현재는 한 갤러리에서 임차를 해 작품들을 전시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밀락 더 마켓과 골목끝집에서 채우기보다는 비워내는 작업을 주로 했던 것 같다는 질문에 이 건축사는 “진정한 비움이 있는 소규모 채플 같은 종교 건축도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건축사사무소 이름 LJL은 이 건축사의 성 ‘이(LEE)’, 건축사이기도 한 그의 아내 성 ‘장(JANG)’, 그리고 그의 아들 성 ‘이(LEE)’를 조합해 만들었다. 가족을 내새워 작업을 하는 만큼 상대에게 믿음을 주고 책임감 있게 작업을 하자는 의미다.
이에 그는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고서도 건물과의 인연을 단절하지 않는다. 틈틈이 대수선을 통해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재시공하고, 원래의 의도대로 기능할 수 있게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
이 건축사는 “건축은 나중에 해체돼 쓰러질때까지 생활과 시간을 담는 일종의 그릇이라 생각한다”면서 “공간이 중후하게 나이들어가기 위해서는 꾸준한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건축주와의 인연, 관계가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소개했다.
서영상 기자
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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