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가 번역 맡은, 유승호의 연극 데뷔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

백승찬 기자 2024. 8. 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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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1980년대 미국 배경
에이즈에 고통받는 동성애자 연기
공연시간 200분…퓰리처상 수상작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서 에이즈 환자 프라이어 역을 맡은 유승호. 글림컴퍼니 제공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다음달 28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는 인터미션 2회를 포함해 200분가량 이어진다. ‘파트 투’까지 포함하면 총 8시간이다. 연출가 신유청의 말마따나 등장인물들은 이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게다가 소재는 2024년 한국 관객에게 다소 낯설다. 1985년 레이건 집권기의 미국이 배경이다. 극우화된 사회 분위기, 모르몬교도와 유대교도의 강고한 신앙과 전통, 에이즈 확산과 그에 대한 공포,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불안 등이 작품에 깔려 있다. 이 시대와 소재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연극일까.

신유청은 기원전 8세기의 <일리아드>,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예를 들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1993년 퓰리처상을 받은 유대계 성소수자 작가 토니 커쉬너는 특수한 시대 배경에 인간의 보편적인 고민과 갈등을 새겨 넣었다. 주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침묵해야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신념과 현실의 충돌 속에서 고민하며, 감염병 원인에 대한 비과학적 추정과 마녀사냥이 이어지며, 배척받아 고통받는 소수자 이야기는 특정 시대와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에이즈로 투병하는 동성애자 프라이어와 병간호에 지쳐 떠나려는 연인 루이스, 독실한 모르몬교도지만 신앙이 금한 정체성을 간신히 억누르는 남편 조셉과 신경안정제에 중독된 부인 하퍼, 성공 가도를 달리는 강경 보수 변호사 로이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접점이 없는 듯한 이들의 삶은 둘로 나뉜 무대에서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는 방식으로 조금씩 엮여 들어간다. 각 인물의 사연은 현실적이지만, 종종 정체 모를 환상적 상황이 무대 위에 펼쳐지기도 한다. 프라이어가 투병 중에 헛것을 보는지, 하퍼가 약물에 취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환상은 진절머리 나는 현실에 종교적 계시처럼 다가온다.

모든 인물의 사연이 낭비되지 않고 매력적이다. 그중 ‘악당’에 가까운 변호사 로이가 호기심을 끈다. 그는 에이즈에 걸렸으면서도 간암이라고, 동성애자면서도 “심심풀이로 남자와 섹스하는 이성애자”라고 우긴다. 정체성이 아니라 영향력이 자신을 규정한다고 믿는 남자다. 로이는 실존인물이다. ‘악마의 변호사’로 불린 로이 마커스 콘은 매카시즘 광풍 속에 로젠버그 부부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자신이 동성애자면서도 동성애자 추방운동을 벌였다. 콘은 경력 초창기 도널드 트럼프의 변호사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2003년 제작된 HBO 시리즈에서는 알 파치노가 로이 역을 맡았다. 이번 연극에서는 이효정·김주호가 더블 캐스팅됐다.

유승호와 손호준이 프라이어 역을 맡았다. 2000년 드라마 <가시고기>로 데뷔한 유승호에겐 이 작품이 첫 연극 무대다. 유승호는 투병에 고통받는 상황을 보여주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연인 루이스와의 감정적 다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냉소같이 미묘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감각은 부족했다. 정혜인과 고준희가 하퍼 역으로 등장한다. 고준희도 이번이 연극 데뷔 무대다. 영화 번역가로 유명한 황석희가 희곡 번역을 맡았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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