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도 31도... 판자촌의 82세 노인은 처음 상의를 벗었다
밖보다 더운 집에 있다 보면 ‘숨이 턱턱’
“집안에 ‘저승의 그림자’가 이글거리는 것 같아”
“올해 열대야는 한마디로 죽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우리 마을이 뜨거운 재를 뒤집어쓴 유령 마을이 된 것만 같아요.”
서울 지역에서 열대야가 32일째 이어진 지난 21일 오후 10시쯤 서울 송파구 장지동 화훼마을. 서울 ‘마지막 무허가 비닐하우스촌’의 주민 박정기(82) 씨는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이날 처음으로 상의를 벗어 던졌다. 6평 남짓한 박 씨의 집은 31.4도, 바깥보다 3도나 높았다. 습도는 80.2%로, 체감온도는 33.5도에 이른다.
창문 하나 없는 이 집의 주방에는 곰팡이가 새까맣게 피었다. 싱크대 옆 덩그러니 놓인 변기의 지린내가 온 집안에 진동했고 바닥엔 새끼 바퀴벌레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박 씨는 유독 길고 더운 올해 여름 날씨 탓에 현관 앞에 간이침대를 따로 두고 문을 열고 잠을 청한다고 했다. 박 씨는 “무더위에 한 숨도 못자고 24시간을 꼬박 새는 날도 있었다”라며 “문을 열어두니 대로변의 매연이 그대로 들어와 목이 칼칼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역대 최장 열대야를 기록할 정도로 폭염이 계속되면서 개조한 비닐하우스나 천막 등에서 거주하는 ‘주거 취약계층’이 더위에 신음하고 있다. 특히 이날 태풍 ‘종다리’가 비를 몰고 오면서 습도까지 높아져 이들은 ‘습식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집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찾은 화훼마을의 현관문들은 대부분 활짝 열려있었다. 비닐하우스를 개조해 만든 집들이 많아 통풍이 잘되지 않는 탓이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여성 독거노인들은 불안함에 떨면서도 방안에 가득차는 습도를 견디지 못해 문을 열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대로변 집에 거주 중인 김신자(77) 씨는 “비닐하우스라 바람 한 점 안 들어와 문을 상시 열어둘 수밖에 없는데, 며칠 전에도 취객이 집 앞까지 와 무서웠다”고 토로했다. 냉방기구로는 오래된 선풍기 한 대가 다인 김 씨의 집안 곳곳에는 물에 적신 걸레와 부채가 놓여 있었다. 김 씨는 “더위에 숨이 막혀 ‘이러다 염라대왕이 오는구나’하고 생각한다”며 “땀을 뻘뻘 흘리는 신세가 서러워서 혼자 울음을 터뜨리곤 한다”고 말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에어컨 설치는 꿈도 못 꾼다는 이상희(70) 씨도 “속옷이 순식간에 땀에 적셔질 정도로 더운데, 문을 열자니 밤이 무섭고 닫자니 죽을만큼 괴롭다”고 한탄했다. 이 씨의 집에는 자꾸만 들어오는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피워둔 모기향 냄새가 배어 있다.
천막촌 사람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1월 발생한 대형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 주민들은 임시 천막에서 두 번째 여름을 맞았다.
이곳 주민들은 8월이 아닌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듯했다. 화재가 지난해 겨울 발생한 탓에 영하의 날씨를 상정하고 지어진 천막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다. 두꺼운 솜이불, 난로와 연탄 등 천막 안은 겨울나기용 물건으로 가득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으려 깔아둔 단열 스티로폼들은 되레 습기를 잔뜩 머금고 내부를 더욱 후텁지근하게 만들고 있었다. 천막 안의 습도는 바깥보다 5도 높은 95도, 습식 사우나나 다름없었다. 주민 A(75) 씨는 “습기 때문에 뼈가 욱신거린다는 느낌을 받는 여름은 올해가 처음이다”라면서 “방에 누워 있으면 무슨 ‘탕’처럼 천천히 삶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열대야와 싸우려고 천막 입구를 열어두었더니 ‘벌레와의 전쟁’이 시작됐다고도 한탄했다. 4지구가 산 중턱에 위치한 탓에 산모기를 비롯한 각종 벌레가 쉴 새 없이 날아들어 잠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더운 새벽에 일어나 활동하려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든다는 주민도 많았다. 주민 이모 씨는 “하루라도 설치지 않고 푹 자보는 게 소원”이라고 토로했다.
글·사진=김린아·전수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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