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4명 중 1명은 말을 듣고 있다
중증 뇌 손상 환자 25%가 외부 지시에 반응
전 세계 ‘숨겨진 의식’ 환자 최대 10만명 추정
심각한 뇌 손상을 입어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환자를 흔히 식물인간으로 부른다. 그러나 의식 장애에 빠진 뇌 손상 환자의 상당수가 사실은 의식이 살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해 의사 소통은 할 수 없지만 주변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 연구교육기관 매스 제네럴 브리검(MGB)이 중심이 된 국제연구진은 중증 뇌 손상 환자 241명을 대상으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과 뇌파 검사(EEG)를 실시해 분석한 결과, 4명 중 1명꼴로 외부의 지시에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들의 뇌 활동 정도는 같은 검사를 받은 건강한 성인들과 똑같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환자들에게 테니스 치기나 수영, 주먹 쥐기, 집 안 걷기 등의 활동을 상상하도록 하면서 뇌 반응을 살펴봤다. 예컨대 ‘주먹을 쥐었다 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한 뒤 15~30초 후 ‘그런 상상을 멈추라’고 하는 식이다. 연구진은 이런 실험을 5분 동안 평균 7차례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뇌 혈류 움직임과 뇌파를 측정한 결과, 환자의 25%인 60명이 이 지시를 반복해서 따랐음을 보여주는 뇌 반응이 나타났다.
겉으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어를 이해하고 지시를 기억하며 주의력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를 전문 용어로 ‘인지-운동 해리’(Cognitive-motor dissociation)라고 부른다.
논문 제1저자인 옐레나 보디엔 박사(신경학)는 “이런 결과는 중증 뇌 손상 환자에 대한 윤리적, 임상적, 과학적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예컨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인지 능력을 탐지해 의사소통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느냐가 연구자들의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인지-운동 해리’ 현상을 보여주는 연구는 거의 20년 전에 처음 발표됐다. 이후 과학자들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환자의 약 15~20%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걸 발견했다. 2019년 미국 웨일코넬의대 연구에선 이런 ‘숨겨진 의식’ 현상이 10명 중 1명꼴로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그 비율이 이보다 훨씬 높을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이와 관련한 연구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연구를 이끈 니컬러스 쉬프 웨일코넬의대 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의식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30만~40만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는 최대 10만명이 ‘숨겨진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생명 유지 장치 제거 결정에 던지는 질문
이번 연구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벨기에 4개국 6개 의료시설에서 약 15년 동안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했다. 환자들은 교통사고나 뇌졸중, 심장마비 같은 외상으로 인해 뇌 손상을 입은 직후 중환자실에 입원했거나, 부상이나 질병을 앓은 지 몇달~몇년이 지나서 요양시설 또는 집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다. 뇌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외상에 의해 뇌 손상을 입었으며, 더 오래 전에 뇌 손상을 입은 경향이 있었다.
연구진은 인지적 자각이 살아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이들에 대한 치료 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예컨대 의료진이 좀 더 미세한 신호에도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며, 환자에게 말을 건넬 수도 있고 병실에 음악을 틀어줄 수도 있다. 반면 ‘인지-행동 해리’를 탐지하지 못할 경우엔 생명 유지 장치를 너무 일찍 제거하거나 재활 기회를 놓치는 등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쉬프 교수는 “이번 연구로 인지 능력이 있으면서도 행동은 할 수 없는 해리 상태가 일반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며 “이제 이런 환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이 세상과 연결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라난 길론 교수(의료윤리)는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산다는 건 많은 이에게 무의미하고, 심지어 혐오스러운 일로 다가올 것”이라며 “그러나 이번 연구가 시사하듯, 의식이 없다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상태일 뿐일 가능성이 크다면, 생명 연장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자신의 의사를 물어주기를 원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뇌 반응을 측정하는 방법이 표준화되지 않아 각 기관마다 다른 방식으로 검사해 데이터에 편차가 있는 점을 한계로 들었다. 연구진은 따라서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평가 방식이 개발돼 더 많은 환자들이 더 쉽게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엔 간단한 지시에 반응한 환자 112명도 포함됐다. 연구진은 이들의 경우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뇌 영상과 뇌파 검사에서 훨씬 더 뚜렷한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38%로 큰 차이는 없었다. 연구진은 이는 뇌 반응 기준치를 높게 잡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뇌 활동을 판독하는 기술이 더 정교해질 경우, 뇌 손상 환자들도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를 이용해 의사 소통이 가능한 날이 올 것으로 기대했다.
매사추세츠종합병원 연구진이 참여해 같은날 같은 학술지에 실린 다른 논문에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40대 환자의 뇌 신호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로 읽어, 그가 의도한 말을 97%의 정확도로 문자와 음성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논문 정보
DOI: 10.1056/NEJMoa2400645
Cognitive Motor Dissociation in Disorders of Consciousness.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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