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건국외교 기조는 ‘국가생존전략’… 대한민국의 탄생 이끌었다[Deep Read]
李, 정치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전환… 독립·건국 위해 일관된 국가생존전략 구사
소련의 ‘北 단독정권 수립’ 의중 간파… 집요한 대미외교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만들어내
윤석열 대통령의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싸고 ‘역사전쟁’이 벌어졌다. 핵심은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의 독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국대통령’이 맞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승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가생존전략’으로 표현되는 이승만의 건국외교를 빼면 독립운동과 정부 수립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건국운동은 설명될 수 없다.
◇이상주의자
국제정치학의 시각으로 보면 평생 외교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만의 대외전략에는 두 가지 시각 혹은 패러다임이 깔려 있었다. 그는 국제법과 통상을 중시하는 ‘정치 이상주의자’로 출발했으나, 나중엔 권력을 중시하는 ‘정치 현실주의자’로 선회했다.
이상주의자 청년 이승만이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을 위해 추구한 정책은 미국이 중국에 적용했던 문호개방정책이었다. 이는 서구 열강의 중국 분할(식민지화)을 반대하고 온전한 중국이 여러 나라에 대등하게 통상을 개방하는 정책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또한 만국공법(당시 국제법을 이르는 말) 예찬론자였다. 그는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만국공법이 대포 한 자루만도 못하다”는 강대국이 선호하는 힘의 논리에 빠지지 말고 만국공법에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문호개방정책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1910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이론적 연장선상에서 1919년 3·1운동 직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하기도 했다. 국제연맹 규약 22조에 따르면 위임통치를 받는 지역은 일체의 군사시설을 둘 수 없고 거주민의 징집도 금지되는 대신에 교역의 문호개방을 적용하게 돼 있었다. 문호개방정책과 위임통치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그 이후에도 문호개방정책을 이론적 토대로 한국의 독립을 추구했다. 1921년 말 시작된 워싱턴회의에서도 한국의 ‘완충국’(buffer state) 역할을 강조했는데 여기서 완충국은 1919년 위임통치청원서에도 등장하는 용어로, 문호개방과 한국의 영세중립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도 한국의 완충국화를 주장했다. 일본 정보기관도 “이승만이 조선을 열국 군대의 보증에 의해 중립국으로서 그 독립을 승인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분석했다.
◇현실주의자
그러나 이승만은 1933년 이후 이러한 자신의 시각을 바꿨다. 그는 훗날 프린스턴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국제법 수업료는 다시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뼈있는 농담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국제법이라는 것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후일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이는 청년 시절 국제법 예찬론자였던 이승만이 더 이상 이상주의자로 남아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점차 국제정치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정치라는 현실을 깨닫게 됐다. 그는 1919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비협조로 자신이 청원한 국제연맹 위임통치가 실현되지 못하자 “윌슨이 권력정치를 위해 한국의 독립을 희생시키려 한다”고 배신감을 토로했다.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도 아무 성과가 없자 “세계가 권력정치라는 낡은 체제의 지속을 냉소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의 체결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선 강대국의 권력정치에 큰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승만은 점차 국제정치를 강대국의 냉정한 이해타산에 의해 움직이는 권력정치로 보게 됐다.
이승만은 1941년 8월 출간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자신의 현실주의적 시각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이상주의에서 강조하는 ‘법률주의’(legalism)와 미국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비판하고, 이제 더 이상 일본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미룰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후 자신의 정치 현실주의 노선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 백미는 1945년 5월 미국이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겼다는 ‘얄타밀약설’ 폭로였다. 검증도 안 된 상태에서 둔 초강수였다. 이승만에게 정보를 건네준 미국 언론인 에밀 고브로가 실존 인물임을 감안하면 그의 폭로가 근거 없었던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이승만 폭로 이후 소련과 미국이 얄타밀약설을 강력히 부인하게 됐고, 강대국 권력정치를 막을 수 있었다.
◇국가생존전략
1945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사태를 관망하다가 현실주의 노선에 입각해 역사적인 ‘정읍선언’(이른바 ‘이승만 독트린’)을 하게 된다. 이는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귀결된다. 정읍선언은 철저히 계산된 발언이었다. 이미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비밀지령을 내려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라고 지시한 바 있었고, 그에 따라 1946년 2월에는 사실상의 중앙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 뒤였다. 이승만은 스탈린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하듯 그에 맞대응했다.
이승만은 정읍선언 후속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1946년 9월 측근 임영신을 미국에 보내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대유엔 외교를 추진했고, 그해 12월에는 자신이 직접 도미해 신탁통치정책을 폐기하고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승만은 미국·소련 협조에 토대를 둔 신탁통치정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이상주의자들이 추진했던 유화정책과 유사하다고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CIA 보고서는 1947년 4월 도미 외교를 마치고 돌아온 이승만이 ‘한국 독립운동의 챔피언으로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유일한 지도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제 누구도 이승만의 카리스마를 거스를 수 없게 됐다. 미국도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현실주의 노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947년 9월 신탁통치정책을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
원래 신탁통치정책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는 윌슨의 이상주의 노선을 계승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추진한 정책이기도 했다. 이승만이 이상주의자로 남아 있었다면 위임통치정책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신탁통치정책을 지지했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탄생
이승만은 1933년을 기준으로 국제정치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꿨지만 국가생존전략이라는 목표만큼은 그대로였다. 그의 대미 건국외교는 적시에 적절한 방식으로 작용해 대한민국의 탄생을 이끌었다.
부산대 정외과 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 용어설명
‘Japan Inside Out’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1941년 출간한 국제정치 분석서. 일본의 군사적 야망으로 인한 이웃 국가들의 고통을 알리며 일본과 미국의 충돌 가능성을 제기.
‘정읍선언’은 이승만이 미 군정기인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행한 발언. ‘남측이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강조한 ‘이승만 독트린’을 담았는데, 이는 후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짐.
■ 세줄 요약
이상주의자 : 이승만은 국제법을 중시하는 ‘정치 이상주의자’로 출발. 문호개방정책을 토대로 한국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 이상주의자 이승만의 행적. 하지만 후일 권력의 속성을 중시하는 ‘정치 현실주의자’로 선회.
현실주의자 : 이승만은 국제정치가 강대국에 의한 권력정치임을 깨달아. 미국서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Japan Inside Out’을 펴내 일본의 침략 야욕과 내면을 분석했으며, 미·소 간의 ‘얄타밀약설’을 폭로하기도 함.
국가생존전략 : 이승만은 소련의 ‘북한 단독정권 수립’ 의중을 간파하고 ‘정읍선언’으로 정면 대응. 그는 ‘국가생존전략’을 외교 기조로 삼아 집요한 대미외교를 벌인 끝에 대한민국의 탄생을 이끌어낸 ‘건국대통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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